







창문 너머 어렴풋이
멀어진 것들이 남기고 간 굴곡진 풍경
기억과 빛이 서성거리는 창가에서 쓰다
여기 두 개의 창이 있다. 하나는 빛이 들지 않는 서향 창이다. 새벽녘 그 창가에 앉아 내다보는 어둠 속에는 익숙하고 그리운 것들이 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눈앞에 머물렀다 희미해진다. 다른 하나는 빛이 가득 들어오는 남향 창이다. 빛은 공간을 점유하고 허락 없이 존재를 만지고 흔적을 남긴다. 빛이 닿은 것은 무엇이든 달라지게 마련이고,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얼룩 또는 무늬가 남는다. 쏟아지는 빛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은 내게 오고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순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소설가이자 번역가, 탁월한 에세이스트로서『열다섯 번의 낮』『몽 카페』등을 펴내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신유진이 신작 에세이 『창문 너머 어렴풋이』로 돌아왔다. 이전 책에서 이삼십 대를 보낸 파리를 중심으로 경계인의 에스프리를 선보인 그가, 이번에는 기억과 빛을 주제로 작고 고요한 마음의 방에서 내면의 창을 응시하며 마주한 열여덟 개의 장면들을 스냅사진처럼 그러모았다.
모든 기억은 창가에서 시작된다. 그때와 지금의 거리감, 시차의 떨림이 감정을 깨우고 의미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내가 아직 지금의 ‘나’에게 당도하지 못했을 때 반딧불이처럼 곁을 덥혔던 온기들, 슬픔과 기쁨만으론 정의할 수 없는 애잔한 감정들을 쓰다듬는 위로의 시간이 창문 너머 어렴풋이 아른거린다.
기억을 볼 수 있는 창과 내게 흔적을 남기는 빛이 들어오는 창. 고백하자면, 그것은 내가 쓰고 싶은 글이기도 합니다.
내 글이 방이라면…, 글자 가득한 방에 기억이 보이는 창 하나와 빛이 들어오는 창 하나를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 창가에는 당신을 위한 편안한 의자를 가져다 놓을 겁니다. _「들어가는 말」, 13쪽
목차
들어가는 말
창문 하나, 기억
빨간 벽돌 이층집 17
미자 28
안녕 37
그 여름의 끝 50
엄마의 창문 59
목격자(Le t?moin) 73
창문처럼 나를 열면 81
창문 둘, 빛
첫 문장이 없는 글 93
눈이 너무 뜨거워서 100
숨 107
한낮의 색채 속으로 112
나무가 되는 꿈 121
창문 메이트 127
은유도 비유도 없는 시 130
창으로 만나기 135
뒤라스의 바다 146
인섬니아 154
소극적 인간의 적극적 관찰 일기 162
책 속으로
엄마와 미자는 저녁이면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마당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아빠를 기다렸고, 미자는 엄마의 기다림을 기다려줬고, 나는 두 여자의 등에 업혀 잠을 잤다. 기다리는 마음, 기다림을 지켜보는 안타까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마음을 여러 겹 포갠 포대기로 나를 둘러업었던 그 여자들의 등,나는 지금도 그 등의 온도를 기억한다. _「미자」, 32쪽
나는 엄마를 안고 아이를 어르듯 달랬다. 엄마는 아이처럼 울다가 노인처럼 주저앉았고, 나는 나와 똑같이 우는 엄마를 나와는 다르다고 믿으며 꼭 끌어안았다. 엄마가 처음으로 내 품에서 울었다. 앞으로는 이런 날들이 자주 찾아오겠지. _「엄마의 창문」, 67~68쪽
아침에 눈을 뜨면 커튼을 활짝 열고 첫 문장을 찾는다. 내 어둠을 거두고 환하게 들어와 언어로 탄생하는 것, 그것이 오늘의 첫 문장이 될 것이다. 저기, 창 너머에 나를 기다리는 말이 있을까. _「첫 문장이 없는 글」, 93쪽
언젠가 주저앉아 울던 내 곁을 가만히 지켜주던 사람의 숨도 저기 어딘가에 있을까. 등을 다독여주던 그 사람의 숨은 얼마나 먼 곳에서 다시 나를 만나러 올까. 그런 생각을 하면 모든 숨이 실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모든 존재가 커다란 숨결의 일부이고 전부인 것만 같다. _「숨」, 111쪽
이제 나는 완전히 열지 못했던 창을 활짝 열고 이 기록을 힘껏 던진다. 내게 가장 먼 곳이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임을 기억하며. 여기, 이 글을 저기 멀리서 보고 있으리라는 믿음, 그것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간다. _「창으로 만나기」, 145쪽
가장 빈번히 출몰하는 악몽이자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 왜 하필이면 그 바다 곁에서 글을 썼을까? 그런 물음이 찾아오면 파도 소리, 바람 소리가 뒤라스의 말처럼 들렸다. 울음과 비명 그리고 침묵의 반복. 내게 뒤라스의 세계는 위태로운 곳이었고, 나는 그녀의 글을 통해 위태로운 것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어둡게 지는 것, 불안에 흔들리는 것, 고통에 젖은 것, 그러니까 들추기 싫은 삶의 이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_「뒤라스의 바다」, 150쪽
작가 소개
신유진
작가, 번역가
산문집 『몽 카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 , 소설집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를 지었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 『남자의 자리』 『진정한 장소』 『사진의 용도』와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프랑스 산문선 『가만히 걷는다』를 엮고 옮겼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멀어진 것들이 남기고 간 굴곡진 풍경
기억과 빛이 서성거리는 창가에서 쓰다
여기 두 개의 창이 있다. 하나는 빛이 들지 않는 서향 창이다. 새벽녘 그 창가에 앉아 내다보는 어둠 속에는 익숙하고 그리운 것들이 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눈앞에 머물렀다 희미해진다. 다른 하나는 빛이 가득 들어오는 남향 창이다. 빛은 공간을 점유하고 허락 없이 존재를 만지고 흔적을 남긴다. 빛이 닿은 것은 무엇이든 달라지게 마련이고,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얼룩 또는 무늬가 남는다. 쏟아지는 빛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은 내게 오고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순전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소설가이자 번역가, 탁월한 에세이스트로서『열다섯 번의 낮』『몽 카페』등을 펴내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신유진이 신작 에세이 『창문 너머 어렴풋이』로 돌아왔다. 이전 책에서 이삼십 대를 보낸 파리를 중심으로 경계인의 에스프리를 선보인 그가, 이번에는 기억과 빛을 주제로 작고 고요한 마음의 방에서 내면의 창을 응시하며 마주한 열여덟 개의 장면들을 스냅사진처럼 그러모았다.
모든 기억은 창가에서 시작된다. 그때와 지금의 거리감, 시차의 떨림이 감정을 깨우고 의미의 파도를 만들어낸다. 내가 아직 지금의 ‘나’에게 당도하지 못했을 때 반딧불이처럼 곁을 덥혔던 온기들, 슬픔과 기쁨만으론 정의할 수 없는 애잔한 감정들을 쓰다듬는 위로의 시간이 창문 너머 어렴풋이 아른거린다.
기억을 볼 수 있는 창과 내게 흔적을 남기는 빛이 들어오는 창. 고백하자면, 그것은 내가 쓰고 싶은 글이기도 합니다.
내 글이 방이라면…, 글자 가득한 방에 기억이 보이는 창 하나와 빛이 들어오는 창 하나를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 창가에는 당신을 위한 편안한 의자를 가져다 놓을 겁니다. _「들어가는 말」, 13쪽
목차
들어가는 말
창문 하나, 기억
빨간 벽돌 이층집 17
미자 28
안녕 37
그 여름의 끝 50
엄마의 창문 59
목격자(Le t?moin) 73
창문처럼 나를 열면 81
창문 둘, 빛
첫 문장이 없는 글 93
눈이 너무 뜨거워서 100
숨 107
한낮의 색채 속으로 112
나무가 되는 꿈 121
창문 메이트 127
은유도 비유도 없는 시 130
창으로 만나기 135
뒤라스의 바다 146
인섬니아 154
소극적 인간의 적극적 관찰 일기 162
책 속으로
엄마와 미자는 저녁이면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고 마당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아빠를 기다렸고, 미자는 엄마의 기다림을 기다려줬고, 나는 두 여자의 등에 업혀 잠을 잤다. 기다리는 마음, 기다림을 지켜보는 안타까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마음을 여러 겹 포갠 포대기로 나를 둘러업었던 그 여자들의 등,나는 지금도 그 등의 온도를 기억한다. _「미자」, 32쪽
나는 엄마를 안고 아이를 어르듯 달랬다. 엄마는 아이처럼 울다가 노인처럼 주저앉았고, 나는 나와 똑같이 우는 엄마를 나와는 다르다고 믿으며 꼭 끌어안았다. 엄마가 처음으로 내 품에서 울었다. 앞으로는 이런 날들이 자주 찾아오겠지. _「엄마의 창문」, 67~68쪽
아침에 눈을 뜨면 커튼을 활짝 열고 첫 문장을 찾는다. 내 어둠을 거두고 환하게 들어와 언어로 탄생하는 것, 그것이 오늘의 첫 문장이 될 것이다. 저기, 창 너머에 나를 기다리는 말이 있을까. _「첫 문장이 없는 글」, 93쪽
언젠가 주저앉아 울던 내 곁을 가만히 지켜주던 사람의 숨도 저기 어딘가에 있을까. 등을 다독여주던 그 사람의 숨은 얼마나 먼 곳에서 다시 나를 만나러 올까. 그런 생각을 하면 모든 숨이 실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모든 존재가 커다란 숨결의 일부이고 전부인 것만 같다. _「숨」, 111쪽
이제 나는 완전히 열지 못했던 창을 활짝 열고 이 기록을 힘껏 던진다. 내게 가장 먼 곳이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임을 기억하며. 여기, 이 글을 저기 멀리서 보고 있으리라는 믿음, 그것으로 한 글자씩 써 내려간다. _「창으로 만나기」, 145쪽
가장 빈번히 출몰하는 악몽이자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 왜 하필이면 그 바다 곁에서 글을 썼을까? 그런 물음이 찾아오면 파도 소리, 바람 소리가 뒤라스의 말처럼 들렸다. 울음과 비명 그리고 침묵의 반복. 내게 뒤라스의 세계는 위태로운 곳이었고, 나는 그녀의 글을 통해 위태로운 것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어둡게 지는 것, 불안에 흔들리는 것, 고통에 젖은 것, 그러니까 들추기 싫은 삶의 이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_「뒤라스의 바다」, 150쪽
작가 소개
신유진
작가, 번역가
산문집 『몽 카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 , 소설집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를 지었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 『남자의 자리』 『진정한 장소』 『사진의 용도』와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프랑스 산문선 『가만히 걷는다』를 엮고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