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
“잠들지 못하던 새벽,
낯선 이의 가사 한 소절에 울었던 기억.”
깊은 우울에서 함께 했던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2016년 warm gray and blue에서 발간된 우울증 수기집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의 ‘위로의 예술’ 부분을 새로운 작가들과 함께 썼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던 작품들을 누군가 또 읽고 듣고, 보면서 또다른 위안을 얻었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위로가 된 작품들’이 아닌 ‘함께 했던 작품들’인 까닭은, 어쩌면 우리는 그 작품들과 함께 깊은 우울 속을 버텨나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누군가를 버티게 한 작품들로, 함께 내일을 또 버텨나가면 좋겠습니다.
책 속으로
아픔을 오롯이 혼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아프게 되었으니까. 혼자서는 차마 채울 수 없는 새벽이 있다. 텅 빈 하루가 있다. 예술이 사람을 위로한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삶이 나를 이해하고 어루만져 준다는 가장 일반의 위안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도 서로의 삶을 묻고, 나누고, 그걸로도 부족해 책을 펼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나에게 꼭 맞는 이야기를 만나 마음 내어주고 엉엉 운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우는 사람, 내일을 무서워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힘들어하는. 버티지 않고도 그냥 사는 법을 잊은 우리가 오늘도 한가득 고여있다. 영화 <노팅힐> 마지막 장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준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그쵸?” 참 쉽고도, 멋진 일. 누군가 손을 나에게 내민다는 것도, 나의 손을 잡으려 한다는 것도. 누군가 내 손을 잡으려 한다면,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다만 나는 당신에게 손 내밀고 싶다. 나를 잡아달라고, 그리고 당신 손을 잡아주고 싶다. 기꺼이. 우리는 모두 망가져서, 서로가 필요하니까.
취미는 후회요, 특기는 자책이로다. 그렇게 여러 날의 반복이었다. 나는 종종 불친절한 사람이 되었다가 또 금세 사과를 하고 다시 돌아온다. SNS에선 익숙함에 속아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말자는 글귀가 유행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친구와 애인의 이름을 적어 넣으며 행복해한다. 나는 슬며시 그곳에 ‘가족’을 적다가 남사스러워서 냉큼 지워버린다.
상처의 크기는 잴 수도 없고 깊이는 더욱더 따져볼 수 없다. 다른 이의 상처를 누구 맘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가벼운지 무거운지 얕은지 깊은지. 그래서 나는 늘 <하루의 끝>을 들을 때마다 끊지 못하고 4분 37초의 겨울을 보낸다.
그래, 맨 처음에 적었던 말은 거짓말이다. 실은 죽으러 바다에 갔었다. 아니, 그때는 몰랐지만 바다에 가야겠다는 그 갑작스러운 충동을 나중에 돌아보니 그랬다. 아무도 내 슬픔에 관심이 없고 나조차 내 슬픔이 부끄러우니 차라리 사라져버리자, 그때 나는 그런 심정이었다. 죽으면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누가 좀 알아줄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
“잠들지 못하던 새벽,
낯선 이의 가사 한 소절에 울었던 기억.”
깊은 우울에서 함께 했던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2016년 warm gray and blue에서 발간된 우울증 수기집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의 ‘위로의 예술’ 부분을 새로운 작가들과 함께 썼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던 작품들을 누군가 또 읽고 듣고, 보면서 또다른 위안을 얻었다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위로가 된 작품들’이 아닌 ‘함께 했던 작품들’인 까닭은, 어쩌면 우리는 그 작품들과 함께 깊은 우울 속을 버텨나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누군가를 버티게 한 작품들로, 함께 내일을 또 버텨나가면 좋겠습니다.
책 속으로
아픔을 오롯이 혼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아프게 되었으니까. 혼자서는 차마 채울 수 없는 새벽이 있다. 텅 빈 하루가 있다. 예술이 사람을 위로한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삶이 나를 이해하고 어루만져 준다는 가장 일반의 위안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도 서로의 삶을 묻고, 나누고, 그걸로도 부족해 책을 펼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나에게 꼭 맞는 이야기를 만나 마음 내어주고 엉엉 운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우는 사람, 내일을 무서워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힘들어하는. 버티지 않고도 그냥 사는 법을 잊은 우리가 오늘도 한가득 고여있다. 영화 <노팅힐> 마지막 장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준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그쵸?” 참 쉽고도, 멋진 일. 누군가 손을 나에게 내민다는 것도, 나의 손을 잡으려 한다는 것도. 누군가 내 손을 잡으려 한다면, 나는 그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다만 나는 당신에게 손 내밀고 싶다. 나를 잡아달라고, 그리고 당신 손을 잡아주고 싶다. 기꺼이. 우리는 모두 망가져서, 서로가 필요하니까.
취미는 후회요, 특기는 자책이로다. 그렇게 여러 날의 반복이었다. 나는 종종 불친절한 사람이 되었다가 또 금세 사과를 하고 다시 돌아온다. SNS에선 익숙함에 속아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말자는 글귀가 유행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친구와 애인의 이름을 적어 넣으며 행복해한다. 나는 슬며시 그곳에 ‘가족’을 적다가 남사스러워서 냉큼 지워버린다.
상처의 크기는 잴 수도 없고 깊이는 더욱더 따져볼 수 없다. 다른 이의 상처를 누구 맘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가벼운지 무거운지 얕은지 깊은지. 그래서 나는 늘 <하루의 끝>을 들을 때마다 끊지 못하고 4분 37초의 겨울을 보낸다.
그래, 맨 처음에 적었던 말은 거짓말이다. 실은 죽으러 바다에 갔었다. 아니, 그때는 몰랐지만 바다에 가야겠다는 그 갑작스러운 충동을 나중에 돌아보니 그랬다. 아무도 내 슬픔에 관심이 없고 나조차 내 슬픔이 부끄러우니 차라리 사라져버리자, 그때 나는 그런 심정이었다. 죽으면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누가 좀 알아줄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