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압록강은 흐른다 (한지 에디션)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1946년 독일 문단이 그해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전설의 소설
조선인 이미륵이 망명지에서 독일어로 쓴 가장 한국적인 소설
정작 우리는 몰랐던 월드클래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출간 28년 만에 500번을 선보인다. 500번의 주인공은 20세기 디아스포라 문학의 고전 『압록강은 흐른다』이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제의 수배를 피해 독일로 망명한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다. 망명 후 이미륵은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철학·생물학을 공부했고 1928년 동물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자연과학이었지만 독일 잡지 《디 다메》에 작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과 산문을 꾸준히 독일어로 썼던 그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미륵의 이름을 독일 문단에 널리 알린 것은 1946년 피퍼 출판사에서 간행된 독일어 장편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였다.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식민지 조선의 현실, 망명에 이르는 과정 등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초판이 매진될 만큼 독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해의 뛰어난 독일어 작품으로 선정되는가 하면,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릴 시간은 길지 않았다. 1950년, 위암으로 생을 마감한 그는 2024년, 타계 74년 만에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이 이미륵의 이름을 호명한다. 유해의 귀환과 더불어 이루어진 문학의 귀환이다. 오랫동안 유예되어 온 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 74년이 걸린 셈이다.
목차
수암 7
독약 14
처음 받은 벌 23
남문에서 31
칠성 37
불공 어머니 49
아버지 56
신식학교 74
시계 83
방학 94
옥계천변에서 104
삼년상 118
송림 포구에서 123
새해에 131
가뭄 140
대학 입학시험 146
서울 156
구학문과 신학문 165
이별 174
압록강은 흐른다 186
기다림 200
대양 위에서 206
해안 213
목적지에 219
옮긴이의 말 227
작품 해설 235
작가 연보 245
책 속으로
“아, 처참한 시절, 더러운 세상이로다!” (111쪽)
“나는 바람을 쐬기도 싫었다. 파괴된 성벽들과 헐어 버린 성탑들이 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크나큰 공포를 내 가슴에다 떠밀어 넣는 것이었다. 나는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 나는 어쩐지 아직은 약간 보호를 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혈육이었으니, 아무래도 그는 나를 따뜻이 받아줄 것이었다.” (112쪽)
“내가 아직 서당에 다니던 때, 나는 내 유년의 많은 날들을 그 나무들의 그늘 아래에서 보냈더랬다.” (112쪽)
“그날 저녁 내내 나는 이 의사 저 의사를 부르러 뛰어다녔다. 자정이 지난 직후에 어머니는 내게 아버지의 왼쪽에 꿇어앉게 하고 내 손 안에 아버지의 손을 꼭 쥐도록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빌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빌고 있는 동안, 구월이는 길고 흰 천으로써 병상으로부터 대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영혼이 가실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 (116-117쪽)
“나는 책을 읽느라 자주 자정이 넘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일본어를 매우 많이 배워야 했고 모든 과목의 교과서들이 일본어 책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공부가 이전보다 더 어려워지고 공부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역사 과목에서 우리는 전부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이 독립되어 있던 시대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한국 민족이 더는 독자적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고찰되지 않고 예로부터 일본 제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던 변경 민족 그룹에 불과한 것으로 고찰되었기 때문에, 말소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19쪽)
“모든 농부들과 그들의 아낙들은 새로운 왕가가 우리나라에 나타나자마자 그 옛날의 좋은 시절이 곧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런 믿음을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도 우리 민족을 위해 더 나은 시대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믿음에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지는 않았다.” (123쪽)
“나는 자주 그런 집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이곤 했는데, 그것은 그 이야기가 어떻게 진전되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가 우리나라에 아직도 평화가 깃들어 있던 나의 걱정 없던 유년 시절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단지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130쪽)
“그녀는 내게 버드나무 가지들로 만든 조그만 바구니 하나를 건네주셨는데, 그 안에는 단지 가벼운 양복 한 벌, 줄이 달린 은제 회중시계 하나 그리고 한 조그만 묶음의 돈만 들어 있었다. 이것이 어릴 적에 내가 그토록 자주 꿈꾸곤 했던 저 다른 세계로의 큰 여행을 위해 내가 지참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안개와 어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시내를 훨씬 벗어나는 길까지 나를 배웅해 주셨다.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어머니는, 우리 둘이 줄곧 침묵을 지키며 걸어온 뒤에, 말씀하셨다.” (184쪽)
“자주 겁을 먹기도 했지. 하지만, 넌 네가 갈 길을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어. 나는 너를 깊이 신뢰한다. 부디 용기를 내렴! 너는 어렵잖게 국경을 넘어갈 게다. 그리고, 마침내 너는 유럽으로도 가게 될 것이다. 이 어미 걱정은 하지 말아라! 난 네가 다시 여기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세월은 정말 아주 빨리 지나간단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넌 내 인생에서 내게 많은, 대단히 많은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자, 내 아들, 이제 혼자 계속 가거라!” (184-185쪽)
『압록강은 흐른다』는 얼핏 보기에는 작가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아무 가감 없이 담담히 서술해 나간 자전적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그 겉모양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 실제 소설을 읽어 나가면, 그리고 실제로 소설을 써 보기도 한 내 경험과 시각으로 보자면, ‘유년 시절의 추억’이라는 소박한 형식 안에다,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은 ‘어느 망국의 역사와 문화’라는 심원한 내용을 정교하게 교직(交織)해 넣어 놓은, 서술 미학적으로도 대단히 품위 있고 아름다운 ‘작품’이다.(옮긴이의 말에서)
21세기의 우리는 어쩌면 이미륵보다 더 많이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고, 도시를 옮기고, 언어를 바꾸고, 정체성의 좌표를 잃어가며. 누구나 아웃사이더이고 누구나 어딘가로부터 추방된 자인 시대에 이미륵의 소설은 새로운 정전(正典, canon)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왜 떠돌고 있는지, 그 유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환기시켜 준다. (작품 해설에서 )
작가 소개
이미륵
본명 이의경(李儀景). 독일식 이름은 Mirok Li.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며 한학을 익혔으며 이후 신교육을 접했다.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으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거쳐 1920년 독일로 망명했다.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철학·생물학을 공부했고 1928년 동물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자연과학이었지만 1931년 독일 잡지 《디 다메》에 작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과 산문을 꾸준히 독일어로 썼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미륵을 독일 문단에 널리 알린 작품은 1946년 피퍼 출판사에서 간행된 독일어 장편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였다.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식민지 조선의 현실, 망명에 이르는 과정 등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초판이 매진될 만큼 독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해의 뛰어난 독일어 작품으로 선정되는가 하면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한국에는 1959년 전혜린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1950년 뮌헨 근교 그래팰핑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과 독일을 잇는 특별한 유산으로 남은 그와 그의 문학을 기려 2019년 독일 그래팰핑에는 이미륵 기념 동판이 세워졌다. 그 위에는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말,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가 새겨져 있다. 2024년 11월, 타계 74년 만에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압록강은 흐른다 (한지 에디션)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1946년 독일 문단이 그해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전설의 소설
조선인 이미륵이 망명지에서 독일어로 쓴 가장 한국적인 소설
정작 우리는 몰랐던 월드클래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출간 28년 만에 500번을 선보인다. 500번의 주인공은 20세기 디아스포라 문학의 고전 『압록강은 흐른다』이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제의 수배를 피해 독일로 망명한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다. 망명 후 이미륵은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철학·생물학을 공부했고 1928년 동물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자연과학이었지만 독일 잡지 《디 다메》에 작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과 산문을 꾸준히 독일어로 썼던 그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미륵의 이름을 독일 문단에 널리 알린 것은 1946년 피퍼 출판사에서 간행된 독일어 장편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였다.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식민지 조선의 현실, 망명에 이르는 과정 등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초판이 매진될 만큼 독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해의 뛰어난 독일어 작품으로 선정되는가 하면,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릴 시간은 길지 않았다. 1950년, 위암으로 생을 마감한 그는 2024년, 타계 74년 만에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이 이미륵의 이름을 호명한다. 유해의 귀환과 더불어 이루어진 문학의 귀환이다. 오랫동안 유예되어 온 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데 74년이 걸린 셈이다.
목차
수암 7
독약 14
처음 받은 벌 23
남문에서 31
칠성 37
불공 어머니 49
아버지 56
신식학교 74
시계 83
방학 94
옥계천변에서 104
삼년상 118
송림 포구에서 123
새해에 131
가뭄 140
대학 입학시험 146
서울 156
구학문과 신학문 165
이별 174
압록강은 흐른다 186
기다림 200
대양 위에서 206
해안 213
목적지에 219
옮긴이의 말 227
작품 해설 235
작가 연보 245
책 속으로
“아, 처참한 시절, 더러운 세상이로다!” (111쪽)
“나는 바람을 쐬기도 싫었다. 파괴된 성벽들과 헐어 버린 성탑들이 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크나큰 공포를 내 가슴에다 떠밀어 넣는 것이었다. 나는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 나는 어쩐지 아직은 약간 보호를 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혈육이었으니, 아무래도 그는 나를 따뜻이 받아줄 것이었다.” (112쪽)
“내가 아직 서당에 다니던 때, 나는 내 유년의 많은 날들을 그 나무들의 그늘 아래에서 보냈더랬다.” (112쪽)
“그날 저녁 내내 나는 이 의사 저 의사를 부르러 뛰어다녔다. 자정이 지난 직후에 어머니는 내게 아버지의 왼쪽에 꿇어앉게 하고 내 손 안에 아버지의 손을 꼭 쥐도록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오른손을 잡고 빌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빌고 있는 동안, 구월이는 길고 흰 천으로써 병상으로부터 대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영혼이 가실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 (116-117쪽)
“나는 책을 읽느라 자주 자정이 넘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일본어를 매우 많이 배워야 했고 모든 과목의 교과서들이 일본어 책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공부가 이전보다 더 어려워지고 공부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역사 과목에서 우리는 전부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이 독립되어 있던 시대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한국 민족이 더는 독자적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고찰되지 않고 예로부터 일본 제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던 변경 민족 그룹에 불과한 것으로 고찰되었기 때문에, 말소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19쪽)
“모든 농부들과 그들의 아낙들은 새로운 왕가가 우리나라에 나타나자마자 그 옛날의 좋은 시절이 곧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그런 믿음을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도 우리 민족을 위해 더 나은 시대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믿음에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지는 않았다.” (123쪽)
“나는 자주 그런 집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이곤 했는데, 그것은 그 이야기가 어떻게 진전되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가 우리나라에 아직도 평화가 깃들어 있던 나의 걱정 없던 유년 시절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단지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130쪽)
“그녀는 내게 버드나무 가지들로 만든 조그만 바구니 하나를 건네주셨는데, 그 안에는 단지 가벼운 양복 한 벌, 줄이 달린 은제 회중시계 하나 그리고 한 조그만 묶음의 돈만 들어 있었다. 이것이 어릴 적에 내가 그토록 자주 꿈꾸곤 했던 저 다른 세계로의 큰 여행을 위해 내가 지참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안개와 어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시내를 훨씬 벗어나는 길까지 나를 배웅해 주셨다.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어머니는, 우리 둘이 줄곧 침묵을 지키며 걸어온 뒤에, 말씀하셨다.” (184쪽)
“자주 겁을 먹기도 했지. 하지만, 넌 네가 갈 길을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어. 나는 너를 깊이 신뢰한다. 부디 용기를 내렴! 너는 어렵잖게 국경을 넘어갈 게다. 그리고, 마침내 너는 유럽으로도 가게 될 것이다. 이 어미 걱정은 하지 말아라! 난 네가 다시 여기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세월은 정말 아주 빨리 지나간단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넌 내 인생에서 내게 많은, 대단히 많은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자, 내 아들, 이제 혼자 계속 가거라!” (184-185쪽)
『압록강은 흐른다』는 얼핏 보기에는 작가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아무 가감 없이 담담히 서술해 나간 자전적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그 겉모양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 실제 소설을 읽어 나가면, 그리고 실제로 소설을 써 보기도 한 내 경험과 시각으로 보자면, ‘유년 시절의 추억’이라는 소박한 형식 안에다,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은 ‘어느 망국의 역사와 문화’라는 심원한 내용을 정교하게 교직(交織)해 넣어 놓은, 서술 미학적으로도 대단히 품위 있고 아름다운 ‘작품’이다.(옮긴이의 말에서)
21세기의 우리는 어쩌면 이미륵보다 더 많이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고, 도시를 옮기고, 언어를 바꾸고, 정체성의 좌표를 잃어가며. 누구나 아웃사이더이고 누구나 어딘가로부터 추방된 자인 시대에 이미륵의 소설은 새로운 정전(正典, canon)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왜 떠돌고 있는지, 그 유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환기시켜 준다. (작품 해설에서 )
작가 소개
이미륵
본명 이의경(李儀景). 독일식 이름은 Mirok Li.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며 한학을 익혔으며 이후 신교육을 접했다.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으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거쳐 1920년 독일로 망명했다.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철학·생물학을 공부했고 1928년 동물학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자연과학이었지만 1931년 독일 잡지 《디 다메》에 작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과 산문을 꾸준히 독일어로 썼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뮌헨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이미륵을 독일 문단에 널리 알린 작품은 1946년 피퍼 출판사에서 간행된 독일어 장편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였다.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식민지 조선의 현실, 망명에 이르는 과정 등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초판이 매진될 만큼 독일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해의 뛰어난 독일어 작품으로 선정되는가 하면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한국에는 1959년 전혜린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1950년 뮌헨 근교 그래팰핑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과 독일을 잇는 특별한 유산으로 남은 그와 그의 문학을 기려 2019년 독일 그래팰핑에는 이미륵 기념 동판이 세워졌다. 그 위에는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말,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가 새겨져 있다. 2024년 11월, 타계 74년 만에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