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비순수
"사람들은 《순수와 비순수》가 나의 가장 훌륭한 작품임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삶 자체가 문학이었던, 시대의 아이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작품 《순수와 비순수》가 출간되었다. 50대 후반인 1930~1931년에 써서 1932년에 《이 쾌락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70세에 가까워진 1941년에 최종 형태로 다듬어 지금의 제목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첫 남편 윌리의 대필 작가들과 ‘글 공장’에서 보낸 20대 시절과 별거 후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뮤직홀 배우로 활동하며 작가로 성장했던 30대에 교류했던 별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하나의 작품으로 엮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관능에 관한 인류의 보물 같은 지식에 개인적으로 기여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순수와 비순수》는 콜레트가 자신의 삶에서, 글에서 끌어올린 인물들 (카사노바, 여장 남자, 중독자, 남장 여자, 동성애자 등)에 대한 묘사와 대화, 일화들과 기억들을 통해 쾌락과 관능, 욕망과 질투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정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드러내고 또 그들을 별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걷어내면서 동시에 아첨과 관음의 장애물 역시 피해 가는 이 작품은 보편적이고 경직된 진실을 제안하기보다, 인간 행동의 신비롭고 복잡한 굴곡을 연구해나간다.
목차
순수와 비순수 - 9p
옮긴이의 말 - 221p
책 속에서
나는 그녀가 젊은 애인에게 주었던, 한 편의 소설 같은 선물을 떠올렸다. 절반만 허락된 쾌락, 억수 같은 흐느낌의 절정에서 위태롭던 균형이 깨질 때까지 같은 음을 되풀이하며 점점 길어지고 빨라지던 꽉 찬 음표가 만들어 내는 밤꾀꼬리 같은 신음... 바로 그것이 그녀의 비밀이자, 감미롭고 은혜로운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녀의 젊은 애인이 무척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까탈스럽고 허약한 청년에게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찬사를 안겨 주기 위해 세심하게 애쓰는 상대의 속임수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기준으로 행복을 가늠한다면 말이다. - 26p
“우습지 않나요, 우리 같은 커플에서 한참 연상인 제가 – 그이는 스물두 살이에요 –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라니... 제 마음은 온전히 이 아이에게 충실해요. 하지만 마음이란 뭘까요? 마음은 과대평가되어 있죠. 마음이란 건 아주 편리해요. 모든 걸 받아들이니까. 이미 가진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몸은... 아, 얼마나 다행인지! 몸은 이른바 미식가처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요. 마음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엔 언제나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그 증거랍니다.” -31p
“세상에, 당신은 내가 마센을 크게 질투한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난 누군가를 육체적으로 질투할 정도로 천박하진 않다고.”
나는 그의 말이 맞다는 다정한 신호를 보내고는 저녁 여섯 시의 까끌까끌한 그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는 떠났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친애하는 친구여, 육체적이지 않은 질투도 있나요?’ - 48p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얼굴이 늙어 가고 목 근육에 통증이 생기고 말하는 이에게 시선을 고정하느라 눈꺼풀이 뻣뻣해지는 작업이다... 일종의 열성적인 폭식이다... 듣는 일뿐만 아니라 해석하는 행위도... 나열된 무미건조한 낱말들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를 찾아내고 신랄함을 고통으로, 야성적인 욕망으로 끌어올린다... - 63p
“어떤 여자는 어떤 남자에게 동성애의 위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지?”
“그런 식으로 너와 나의 자존심은 달랠 수 있겠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대체 누가 우리를 여자로 생각하겠어?”
“다른 여자들이. 여자들만이 우리의 정신적인 남성성에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속아 넘어가지도 않지. 잘 생각해 봐...” - 78p
내가 남자 흉내를 내던 때, 그때 나는 얼마나 겁먹었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지만 얼마나 여성스러웠나! “대체 누가 우리를 여자로 생각하겠어?” “다른 여자들이.” 속지 않은 건 오직 여자들뿐이었다. 앞면에 주름이 잡힌 셔츠, 뻣뻣한 목깃, 때때로 조끼, 언제나 실크 손수건 같은 뚜렷한 기호를 활용해 나는 모든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던, 소멸해 가던 세계를 자주 드나들었다. 비록 지난 25년에서 30년 동안 풍습은 –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바뀌지 않았지만, 특권 의식이 스스로 소멸함으로써 앞서 말한 이미 약해져 있던 세계를 점차 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사회의 공기와도 같은 위선 없이 존재하려고 애썼다. 남장 여자들은 ‘개인적 자유’를 호소했고 자신들의 사랑도 견고하고 공고한 남성의 동성애와 동등하다고 자처했다. 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남장 여자에게 엄격했던 레핀 경찰국장을 조롱했다. 파티를 구성원들끼리만 비밀리에 열 것을 요구하고, 파티에 가면 긴 바지와 턱시도를 입고 깍듯이 행동했다. 그녀들은 주사위 놀이와 카드놀이를 하는 죄스러운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술집과 식당을 드나들기를 원했다. 그러다가 단념했고, 이제 막 구성원이 된 가장 강경한 여성조차 자선 사업을 하는 부인처럼 검소하고 긴 외투를 걸쳐 그녀가 입은 남자 양복이나 가장자리에 장식이 달린 재킷을 숨기지 않고는 길을 건너지도,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게 되었다... - 85p
하루살이처럼 녹아 없어지는 존재를 밑바닥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무정함이 얼마나 협조했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나는 자신의 힘을 최후의 순간까지 절대로 발휘하지 않는 부류였기에 삶을 탕진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냉담하다. 내가 보기에 자발적인 탕진은 항상 일종의 알리바이다. 쾌락을 좇는 습관과, 이를테면 담배를 피우는 습관 사이에 그다지 차이가 없을까 봐 나는 두렵다. 남자든 여자든 흡연자는 담배 한 개비에 붙을 붙일 때마다 자신의 삶에 나태함을 끌어들이고 정당화한다. - 125p
“너도 알겠지만 여자로 남은 여자는 완전한 인간이야. 그녀에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 심지어 ‘여자 친구’와 관련된 측면에서도. 하지만 남자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로테스크해져. 남자인 척하는 여자만큼 우스꽝스럽고 슬픈 게 어디 있겠어? 적어도 이 생각만은 너도 바꾸지 못해. 뤼시엔 드 OOO 말인데, 그녀가 남자 옷을 입기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 중독됐단 생각이 들지 않니?”
“무엇에 중독됐죠?”
“바로 그날부터 그녀의 ‘여자 친구들’은 그녀가 남자가 아니란 사실을 까먹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어리석게도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었어... 그래서 원하는 상대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면서도 항상 ‘불만스러운 티’를 냈지. 머리에 박힌 그 생각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더 심각한 건, 자신에 대한 확신도 잃고 말았어. 멋쟁이긴 하지. 하지만 불만으로 가득 찬 멋쟁이라고. 불만이라고 했지 ‘슬프다’고 하진 않았어. 약간의 슬픔은 여자들끼리의 사랑에 전혀 해롭지 않아. 슬픔은 빈 곳을 채워 주거든. 여자라면 누구나 자기가 슬펐던 시절을 그리워해 봤을걸.” -131p
프루스트가 소돔에 빛을 환히 비춘 이래로 우리는 그가 쓰는 내용에 존경심을 느낀다. 프루스트 이후로, 용의주도하게 흔적을 흩뜨리고, 먹물을 내뿜는 오징어처럼 발자국마다 독특한 암운을 퍼뜨리는, 쫓기는 존재들을 우리는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다.
그런데 – 그는 착각했던 걸까, 무지했던 걸까? – 이해할 수 없고 행실 나쁜 아가씨들의 고모라를 프루스트가 창조했을 때, 나쁜 천사들의 협약, 공동체, 광기를 규탄했을 때, 우리는 소돔을 가로질러 우리를 이끌었던 무서운 진실이 주는 위안을 잃었기에, 기분이 약간 전환되고 관대해지며 조금 무관심해질 뿐이다. 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상상이거나 오류일 뿐, 고모라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춘기, 중등학교, 외로움, 감옥, 일탈, 속물근성... 이것들은 빈약한 묘판이어서, 기반이 튼튼한 수많은 악습과 그에 필수 불가결한 연대의 싹을 틔우고 양분을 공급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온전하고 거대하고 영원한 소돔이 높은 곳에서 초라한 모조품을 굽어본다. -165p
나의 이상한 친구들은 내 앞에서 어떤 대화도 삼가지 않았다. 난폭한 죽음, 불가피한 협박, 금품 탈취, 수치스러운 소송... 넥타이, 끝단을 접은 바지, 음악, 문학, 지참금, 결혼 등. 왜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부류를 ‘지각없다’고 여기는지 나는 묻고 싶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이 영위하는 삶의 위험성과 그들 특유의 배타성이 갖는 한계를 알고, 신중함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지만 곧잘 그것을 잊어버리는 융통성도 지니고 있었다. - 174p
죽이고 싶은 갈망에까지 이르러야 질투가 훈련되는 것은 아니다. 고무줄처럼 잡아당겨지고 한순간 느슨해졌다가 다시 팽팽해지는, 이 피할 수 없는 갈망은 연습이 된다는 장점을 지닌다. 육체적 욕망에 가려 어두워지는 시간들을 제외하면, 속았고 이용당했다고 소리치고 굶주린 척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질투라는 악이 인간이 살아가고 일하는 것, 심지어 정직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조차 가로막는다는 주장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전에 나는 조심성 없이 “질투에 깊이 빠진다”는 표현을 썼다. 질투는 전혀 저급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겸손하고 고개 숙인 우리 모습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질투는 우리가 결코 익숙해지지 않으면서 견뎌 내는 유일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나의 가장 충실한 기억들을 불러온다. 충실한 기억이란 밤바람, 이끼로 뒤덮인 벤치,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벽이나 드레스에 비친 불빛과 그림자의 춤처럼 여분의 소품을 요구하지 않는 기억들을 뜻한다. 주변을 물들이는 힘이 강한 질투는 그것이 만나는 모든 대상에 강렬하고 선명한 색상을 불어넣는다. - 209p
작가 소개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독보적인 프랑스 작가. 브루고뉴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나 자연과 동물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독서광이었다. ‘윌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출판업자와 결혼하면서 파리 사교계와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는데, 그녀의 섬세한 감각을 알아본 남편의 독려로 자전적인 소설 『클로딘, 학교에서』(1900), 『파리의 클로딘』(1902), 『클로딘의 결혼생활』(1902)을 쓰게 된다. 남편의 이름을 빌려 출간한 소설들이 큰 화제가 되지만, 계속해서 소설을 써내라는 남편과 불화를 겪고 이혼하게 된다.
클로딘 연작에 대한 판권도 빼앗긴 채 연극배우로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는데, 시대를 앞선 선구자로서 모든 편견에 맞섰다. 결국 당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작가적 성취를 인정받으면서 프랑스 문화의 아이콘이 된다. 『지지』, 『암고양이』, 『셰리』 등 모든 작품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특히 특유의 감각적 표현과 연인들 간의 심리묘사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5년에 공쿠르아카데미 최초 여성 회원이 되는가 하면 결국 회장까지 지내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르는 등 프랑스 문학계의 영웅이 된다.
1차 세계대전 동안은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세 번째 남편인 유대인 보석상 모리스 고데케가 게슈타포에 끌려가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지금도 콜레트의 삶과 소설들이 연극과 영화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으며, 트루먼 커포티는 「하얀 장미」에서 콜레트에 대해 쓰기도 했다
순수와 비순수
"사람들은 《순수와 비순수》가 나의 가장 훌륭한 작품임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삶 자체가 문학이었던, 시대의 아이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작품 《순수와 비순수》가 출간되었다. 50대 후반인 1930~1931년에 써서 1932년에 《이 쾌락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70세에 가까워진 1941년에 최종 형태로 다듬어 지금의 제목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첫 남편 윌리의 대필 작가들과 ‘글 공장’에서 보낸 20대 시절과 별거 후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뮤직홀 배우로 활동하며 작가로 성장했던 30대에 교류했던 별난 인물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하나의 작품으로 엮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관능에 관한 인류의 보물 같은 지식에 개인적으로 기여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순수와 비순수》는 콜레트가 자신의 삶에서, 글에서 끌어올린 인물들 (카사노바, 여장 남자, 중독자, 남장 여자, 동성애자 등)에 대한 묘사와 대화, 일화들과 기억들을 통해 쾌락과 관능, 욕망과 질투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정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드러내고 또 그들을 별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걷어내면서 동시에 아첨과 관음의 장애물 역시 피해 가는 이 작품은 보편적이고 경직된 진실을 제안하기보다, 인간 행동의 신비롭고 복잡한 굴곡을 연구해나간다.
목차
순수와 비순수 - 9p
옮긴이의 말 - 221p
책 속에서
나는 그녀가 젊은 애인에게 주었던, 한 편의 소설 같은 선물을 떠올렸다. 절반만 허락된 쾌락, 억수 같은 흐느낌의 절정에서 위태롭던 균형이 깨질 때까지 같은 음을 되풀이하며 점점 길어지고 빨라지던 꽉 찬 음표가 만들어 내는 밤꾀꼬리 같은 신음... 바로 그것이 그녀의 비밀이자, 감미롭고 은혜로운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녀의 젊은 애인이 무척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까탈스럽고 허약한 청년에게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찬사를 안겨 주기 위해 세심하게 애쓰는 상대의 속임수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기준으로 행복을 가늠한다면 말이다. - 26p
“우습지 않나요, 우리 같은 커플에서 한참 연상인 제가 – 그이는 스물두 살이에요 –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라니... 제 마음은 온전히 이 아이에게 충실해요. 하지만 마음이란 뭘까요? 마음은 과대평가되어 있죠. 마음이란 건 아주 편리해요. 모든 걸 받아들이니까. 이미 가진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 그렇게 쉬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몸은... 아, 얼마나 다행인지! 몸은 이른바 미식가처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요. 마음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엔 언제나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그 증거랍니다.” -31p
“세상에, 당신은 내가 마센을 크게 질투한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난 누군가를 육체적으로 질투할 정도로 천박하진 않다고.”
나는 그의 말이 맞다는 다정한 신호를 보내고는 저녁 여섯 시의 까끌까끌한 그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는 떠났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친애하는 친구여, 육체적이지 않은 질투도 있나요?’ - 48p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얼굴이 늙어 가고 목 근육에 통증이 생기고 말하는 이에게 시선을 고정하느라 눈꺼풀이 뻣뻣해지는 작업이다... 일종의 열성적인 폭식이다... 듣는 일뿐만 아니라 해석하는 행위도... 나열된 무미건조한 낱말들에서 비밀스러운 의미를 찾아내고 신랄함을 고통으로, 야성적인 욕망으로 끌어올린다... - 63p
“어떤 여자는 어떤 남자에게 동성애의 위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지?”
“그런 식으로 너와 나의 자존심은 달랠 수 있겠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하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대체 누가 우리를 여자로 생각하겠어?”
“다른 여자들이. 여자들만이 우리의 정신적인 남성성에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속아 넘어가지도 않지. 잘 생각해 봐...” - 78p
내가 남자 흉내를 내던 때, 그때 나는 얼마나 겁먹었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지만 얼마나 여성스러웠나! “대체 누가 우리를 여자로 생각하겠어?” “다른 여자들이.” 속지 않은 건 오직 여자들뿐이었다. 앞면에 주름이 잡힌 셔츠, 뻣뻣한 목깃, 때때로 조끼, 언제나 실크 손수건 같은 뚜렷한 기호를 활용해 나는 모든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던, 소멸해 가던 세계를 자주 드나들었다. 비록 지난 25년에서 30년 동안 풍습은 –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바뀌지 않았지만, 특권 의식이 스스로 소멸함으로써 앞서 말한 이미 약해져 있던 세계를 점차 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사회의 공기와도 같은 위선 없이 존재하려고 애썼다. 남장 여자들은 ‘개인적 자유’를 호소했고 자신들의 사랑도 견고하고 공고한 남성의 동성애와 동등하다고 자처했다. 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남장 여자에게 엄격했던 레핀 경찰국장을 조롱했다. 파티를 구성원들끼리만 비밀리에 열 것을 요구하고, 파티에 가면 긴 바지와 턱시도를 입고 깍듯이 행동했다. 그녀들은 주사위 놀이와 카드놀이를 하는 죄스러운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술집과 식당을 드나들기를 원했다. 그러다가 단념했고, 이제 막 구성원이 된 가장 강경한 여성조차 자선 사업을 하는 부인처럼 검소하고 긴 외투를 걸쳐 그녀가 입은 남자 양복이나 가장자리에 장식이 달린 재킷을 숨기지 않고는 길을 건너지도,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게 되었다... - 85p
하루살이처럼 녹아 없어지는 존재를 밑바닥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무정함이 얼마나 협조했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나는 자신의 힘을 최후의 순간까지 절대로 발휘하지 않는 부류였기에 삶을 탕진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냉담하다. 내가 보기에 자발적인 탕진은 항상 일종의 알리바이다. 쾌락을 좇는 습관과, 이를테면 담배를 피우는 습관 사이에 그다지 차이가 없을까 봐 나는 두렵다. 남자든 여자든 흡연자는 담배 한 개비에 붙을 붙일 때마다 자신의 삶에 나태함을 끌어들이고 정당화한다. - 125p
“너도 알겠지만 여자로 남은 여자는 완전한 인간이야. 그녀에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아. 심지어 ‘여자 친구’와 관련된 측면에서도. 하지만 남자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로테스크해져. 남자인 척하는 여자만큼 우스꽝스럽고 슬픈 게 어디 있겠어? 적어도 이 생각만은 너도 바꾸지 못해. 뤼시엔 드 OOO 말인데, 그녀가 남자 옷을 입기 시작한 바로 그날부터 중독됐단 생각이 들지 않니?”
“무엇에 중독됐죠?”
“바로 그날부터 그녀의 ‘여자 친구들’은 그녀가 남자가 아니란 사실을 까먹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어리석게도 그 생각을 멈출 수 없었어... 그래서 원하는 상대를 차지하는 데 성공하면서도 항상 ‘불만스러운 티’를 냈지. 머리에 박힌 그 생각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고, 더 심각한 건, 자신에 대한 확신도 잃고 말았어. 멋쟁이긴 하지. 하지만 불만으로 가득 찬 멋쟁이라고. 불만이라고 했지 ‘슬프다’고 하진 않았어. 약간의 슬픔은 여자들끼리의 사랑에 전혀 해롭지 않아. 슬픔은 빈 곳을 채워 주거든. 여자라면 누구나 자기가 슬펐던 시절을 그리워해 봤을걸.” -131p
프루스트가 소돔에 빛을 환히 비춘 이래로 우리는 그가 쓰는 내용에 존경심을 느낀다. 프루스트 이후로, 용의주도하게 흔적을 흩뜨리고, 먹물을 내뿜는 오징어처럼 발자국마다 독특한 암운을 퍼뜨리는, 쫓기는 존재들을 우리는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다.
그런데 – 그는 착각했던 걸까, 무지했던 걸까? – 이해할 수 없고 행실 나쁜 아가씨들의 고모라를 프루스트가 창조했을 때, 나쁜 천사들의 협약, 공동체, 광기를 규탄했을 때, 우리는 소돔을 가로질러 우리를 이끌었던 무서운 진실이 주는 위안을 잃었기에, 기분이 약간 전환되고 관대해지며 조금 무관심해질 뿐이다. 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상상이거나 오류일 뿐, 고모라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춘기, 중등학교, 외로움, 감옥, 일탈, 속물근성... 이것들은 빈약한 묘판이어서, 기반이 튼튼한 수많은 악습과 그에 필수 불가결한 연대의 싹을 틔우고 양분을 공급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온전하고 거대하고 영원한 소돔이 높은 곳에서 초라한 모조품을 굽어본다. -165p
나의 이상한 친구들은 내 앞에서 어떤 대화도 삼가지 않았다. 난폭한 죽음, 불가피한 협박, 금품 탈취, 수치스러운 소송... 넥타이, 끝단을 접은 바지, 음악, 문학, 지참금, 결혼 등. 왜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 부류를 ‘지각없다’고 여기는지 나는 묻고 싶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이 영위하는 삶의 위험성과 그들 특유의 배타성이 갖는 한계를 알고, 신중함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지만 곧잘 그것을 잊어버리는 융통성도 지니고 있었다. - 174p
죽이고 싶은 갈망에까지 이르러야 질투가 훈련되는 것은 아니다. 고무줄처럼 잡아당겨지고 한순간 느슨해졌다가 다시 팽팽해지는, 이 피할 수 없는 갈망은 연습이 된다는 장점을 지닌다. 육체적 욕망에 가려 어두워지는 시간들을 제외하면, 속았고 이용당했다고 소리치고 굶주린 척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질투라는 악이 인간이 살아가고 일하는 것, 심지어 정직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조차 가로막는다는 주장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전에 나는 조심성 없이 “질투에 깊이 빠진다”는 표현을 썼다. 질투는 전혀 저급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겸손하고 고개 숙인 우리 모습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질투는 우리가 결코 익숙해지지 않으면서 견뎌 내는 유일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나의 가장 충실한 기억들을 불러온다. 충실한 기억이란 밤바람, 이끼로 뒤덮인 벤치,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벽이나 드레스에 비친 불빛과 그림자의 춤처럼 여분의 소품을 요구하지 않는 기억들을 뜻한다. 주변을 물들이는 힘이 강한 질투는 그것이 만나는 모든 대상에 강렬하고 선명한 색상을 불어넣는다. - 209p
작가 소개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독보적인 프랑스 작가. 브루고뉴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나 자연과 동물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독서광이었다. ‘윌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출판업자와 결혼하면서 파리 사교계와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는데, 그녀의 섬세한 감각을 알아본 남편의 독려로 자전적인 소설 『클로딘, 학교에서』(1900), 『파리의 클로딘』(1902), 『클로딘의 결혼생활』(1902)을 쓰게 된다. 남편의 이름을 빌려 출간한 소설들이 큰 화제가 되지만, 계속해서 소설을 써내라는 남편과 불화를 겪고 이혼하게 된다.
클로딘 연작에 대한 판권도 빼앗긴 채 연극배우로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는데, 시대를 앞선 선구자로서 모든 편견에 맞섰다. 결국 당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작가적 성취를 인정받으면서 프랑스 문화의 아이콘이 된다. 『지지』, 『암고양이』, 『셰리』 등 모든 작품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특히 특유의 감각적 표현과 연인들 간의 심리묘사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5년에 공쿠르아카데미 최초 여성 회원이 되는가 하면 결국 회장까지 지내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오르는 등 프랑스 문학계의 영웅이 된다.
1차 세계대전 동안은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세 번째 남편인 유대인 보석상 모리스 고데케가 게슈타포에 끌려가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지금도 콜레트의 삶과 소설들이 연극과 영화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으며, 트루먼 커포티는 「하얀 장미」에서 콜레트에 대해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