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모던걸 시리즈>
100년 전, 고단한 현실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목소리를 글에 담은 여성 작가들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 문단은 여성 작가의 글을 정식 문학으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안에서 여성의 문학은, 아니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신음하며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부르짖었죠. 하지만 공고한 남성 중심 문단에서 그 목소리는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100년이 훌쩍 흐른 지금, 그 시절 여성 문학은 여전히 우리의 심연에 잠들어 있습니다. <모던걸 시리즈>를 출간하기 위해 많은 근대 여성 작가의 글을 찾아냈고, 면밀히 살폈습니다. 작품을 선정하면서 현재 출판계의 강력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 문학의 본류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모던걸 시리즈>에 실린 모든 작품은 편집자가 직접 현대어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의 뜻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현대의 독자들이 읽는 데 거리감이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과감하면서도 새로운 번역을 시도했습니다. 원문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기를 원하는 고전주의적 독자들에게는 이번 시리즈가 과감함을 넘어 함량 미달의 어떤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고귀한 소수의 문학이기보다 어떤 언어로 담기든 다수의 문학이 이 시대 독자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믿습니다. 현대의 시선으로 큐레이션하고 현대의 언어로 담아낸 작품들은 분명히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작지만 긴 여운을 선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던’한 시대를 살고 있고 ‘지금 여기’의 여성 모두가 모던걸입니다. ‘모던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키워드입니다. ‘모던걸’이라 불렸던 근대 여성들은 유교적 억압에서의 해방과 표현의 자유,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했고, 이 책에 담긴 작품들은 그 흔적입니다. 여성들의 억압에 대한 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들이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첫사랑, 애정하는 것, 다정한 시골 풍경, 보고 싶은 엄마 등 정겹고 익숙한 소재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제조차 여성의 펜 끝으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탄생한 작품들이기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때의 감정들이 현재와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 우리는 먼 시간을 뛰어넘어 강한 유대감을 느낍니다. 이 시리즈가 여전히 모던을 꿈꾸는 독자에게 기분 좋은 배부름이 되기를 원합니다.
수필집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모던걸 시리즈>의 수필집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은 근대 여성작가 백신애와 노천명, 나혜석, 강경애의 진솔하고 단정한 마음이 담겨 있는 수필집이다. 네 명의 작가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관찰과 날카로운 통찰과 성찰을 감각적인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일관되게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행복’을 말한다. 달달한 신혼여행 일화부터 프랑스에서 보내는 정월,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어민들을 향한 애석하고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그 곳에서 찾아낸 작은 희망까지.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찾아낸 삶의 가치가 문장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다. 그야말로 현대인이 추구하는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만한 글로 가득하다. 이들의 글이 험난하고 굴곡졌던 삶처럼 비장할 줄만 알았던 것은 착각이자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읽다보면 어느새 그들과 조잘조잘 수다 떨며 푸른 숲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이 수필집은 네 명의 여성 작가들이 저마다 찾아낸 기쁨과 슬픔, 그리고 깨달음의 기록이다.
책 속으로
P.11 벌써 신혼이라는 그러그러한 때가 저 먼 옛날같이 되어버린 이때에 새삼스럽게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신혼 여행기를 쓰라는 주문을 받고 펜을 들게 되니 공연히 웃음만 납니다. 대체 쓸 만한 거리가 기억에 남아있어야 될 터인데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눈을 감고 여행을 했는지 좌우간 여행기가 될 만한 것이 도통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 백신애, 「슈크림」 중에서
P.51 작가란, 작품 활동에 있어서 놀고 있는 것같이 보여도 머릿속에서는 늘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 무엇을 노래할지 찾고 있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이런 푸른 사슴을 자유롭게 놓아기르기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생활 보장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노천명, 「직장의 변」 중에서
P.78 복잡한 현실에서 우리는 가끔 다른 데를 보며 쉴 필요가 있다. 같이 앉아 있는 방안의 사람이 보기 싫을 때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겠고, 이런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독이라든가 궁기가 낀 살림 부스러기가 아니고 모름지기 한 그루의 싸리나무다.
- 노천명, 「5월의 구상」 중에서
P.116 유럽인의 생활은 성적 생활이라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파리같이 외적 자극과 유혹이 많은 곳이 있으랴. 이들의 내면을 보면 별별 비밀이 다 있겠지만 외면만은 일부일처제로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자유로운 곳에 참사랑이 있는 듯싶다.
- 나혜석,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중에서
P.131 이번에 내가 여기 온 것은 저들의 생활을 탐구하기 위함이었다. 이 부르짖음으로 가슴이 뜨겁게 흔들렸다. 오냐, 작가로서의 사명이 뭐냐. 이 현실을 누구보다도 똑똑히 보고 또 해부하여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나타내 보이는 데 있는 것 아니냐. 예술이란 그 자체가 민중의 생활과 분리되어 있으면 무슨 가치가 있으랴.
- 강경애, 「몽금포 구경」 중에서
소설집 <의심의 소녀>
〈모던걸 시리즈>의 소설집 『의심의 소녀』에는 과거 문단에 의미 있는 족적을 디뎠던 여성 작가들의 다섯 작품을 실었다. 이 소설집에 담긴 소설들은 가장 최근 작품인 「가을」을 기준으로 삼아도 80년이 지난 먼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이야기들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지고 특유의 시선으로 시대를 읽어낸 작가들의 작품은 과거의 독자뿐 아니라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깊은 의미를 남긴다. 어쩌면 각 소설은 과거의 작가가 오늘날에 보낸 편지인지도 모른다.
낡은 도덕관념을 가진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 딸, 불우한 가정사 때문에 이름을 숨기고 떠도는 소녀,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오빠마저 잃은 간호사, 죽은 아내의 친구를 만난 남편, 그리고 구시대적 관습과 오롯이 맞닥뜨려야 하는 신세대. 다섯 저자가 시대를 읽음으로써 적어낸 인물들은 어떤 의미를 전달할까.
『의심의 소녀』는 그 편지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더 선명히 전달되기를 바라 소설 원문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수정했다. 편지를 펼칠 독자들은 이 글을 통해 반갑고도 낯선 연대의 선물을 발견할 것이다.
책 속으로
P.15 그러나 이제는 으레 해야 할 말도 하기가 죄송스럽고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불평하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몸이 아플 때도 어디 아프다는 말조차 하기 미안해졌다.
병원! 약값! 모두 돈 때문이었다.
- 백신애, 「나의 어머니」 중에서
P.51 바람에 문풍지만 울려도 어머닌가, 옆집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오누이는 달려나가 어머니, 하고 문을 열면 밖에는 눈만 내렸다. 그녀가 악을 쓰고 어머니를 부르면 오빠는 그녀를 업고 방안을 빙빙 돌면서 훌쩍훌쩍 울던 그날…….
- 강경애, 「어둠」 중에서
P.70 그럴 때면 일종의 퇴폐적인 애착이 생기기도 했지만, 석재는 어쩐지 그러한 감정의 한 꺼풀 밑에 짙은 원색과도 같은, 꽤 섬뜩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석재가 우정 저편의 존재를 무시한 순간이 정예에게서 그러한 것을 본 때였다.
- 지하련, 「가을」 중에서
P.103 사랑을 원해도 얻지 못하고, 자유를 원해도 얻지 못하며, 헤어지자고 해도 듣지 않고, 의심받고 학대당하고……. 집에 갇혀 삶을 비관하던 부인은 결국 병든 몸을 일으켜 평양 별장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길바닥에서 지나치는 무수한 발걸음에 밟히는 이름 없는 작은 풀까지 꽃 피는 사월의 어느 날, 스물네 살의 젊은 부인은 그렇게 단도로 제 몸을 찔렀다.
- 김명순, 「의심의 소녀」 중에서
P.157~158 그렇다. 먹고 죽는 게 전부라면 그건 동물이나 다름이 없다. 더군다나 자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조상의 재물을 받아 가지고 스스로 뭔가 해보는 건 고사하고, 받은 것도 쓸 줄 몰라 술이나 기생에게 쓸데없이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배 두드리다가 죽는 부자들의 가정에는 별별 비참한 일이 많았다. 거의 짐승과 구별할 수도 없는 일이 많았다. 그런 자는 사람의 가죽을 잠깐 빌려 쓴 것이지, 절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저 댑싸리 그늘 밑에 드러누우려 해도 개가 비웃고 그 자리가 아깝다고 할 것이다.
- 나혜석, 「경희」 중에서
시집 <캐피털 웨이>
<모던걸 시리즈>의 시집 『캐피털 웨이』는 비교적 유명한 작가뿐 아니라 당시 신문에 실렸던 무명의 일반인 여성들의 작품도 함께 실어 다양한 주제의 시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책은 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80개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1부 ‘그대이기에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요’는 사랑의 설렘부터 이별의 아픔까지, 사랑하면서 여자가 겪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다룬 시들로 구성하였다. 2부 ‘누군가 그의 손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이 주로 혼자일 때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을 담은 시로 구성하였다. 3부 ‘구름같이 왔다가는 뜻 모를 이 인생’은 인생의 덧없음이나 쓸쓸함, 그리움의 정조를 지닌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4부 ‘꽃다운 꿈이 뒹구는 서리 내린 밤풍경’은 주로 노천명의 시들로, 그 중에서도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묘사하는 시가 주를 이룬다. 5부 ‘발은 땅에 딛고 있지만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는 여성들에게 모던걸이 되자고 외치는 계몽적인 시들이다. 6부 ‘언니 다시 오실 때가 꽃 필때라기에’는 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담은 시다.
책 속으로
P.15 보슬보슬 / 보슬비가 내려옵니다 / 마당 위에 / 고여 있는 물만 불리는 / 보슬보슬 / 보슬비가 내려옵니다 / 우리 둘이 껴안고 / 이 비를 맞아 / 우리의 사랑에 / 물이 고이면 / 내년 춘삼월이 / 다시 올 때에 / 우리의 헌 사랑에 / 새싹이 날 거예요
- 김명순, 「보슬비」 중에서
P.26 …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 속삭이기에는 이 나이에 겸연쩍고 /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 얘기는 일부러 딴 데로 빗나가고 /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
- 노천명, 「당신을 위해」 중에서
P.42 길바닥에 구르는 사랑아 / 배고픈 이의 입에서 굴러 나와 /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 ‘사랑’이란 거짓말아 /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 ‘사랑’이란 거짓말아 …
- 김명순, 「저주」 중에서
P.102 나무가 항상 하늘을 향하듯이 /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우리 / 별을 쳐다보면서 걸어갑시다 / 친구보다 / 좀 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본댔자 /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 술 한 잔만도 못한 /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 발은 땅을 딛고 서 있지만 우리 / 별을 쳐다보면서 걸어갑시다
- 노천명, 「별을 쳐다보면」 중에서
P.146 울 언니 월급 타면 쓸데 많지요 / 병들은 아버지의 약사들이고 / 날마다 나가라는 집 세금 물고 /
무섭게 호령하는 전기세 물고 / 기한을 연기했던 전당물 찾고 / 두 달 거듭 밀려온 월사금 물고 /
안 먹고 살 수 없는 쌀 되나 사면 / 이달 월급 다 써도 모자란다우
- 박재관, 「울 언니 월급」 중에서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모던걸 시리즈>
100년 전, 고단한 현실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목소리를 글에 담은 여성 작가들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 문단은 여성 작가의 글을 정식 문학으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안에서 여성의 문학은, 아니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신음하며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부르짖었죠. 하지만 공고한 남성 중심 문단에서 그 목소리는 비주류가 되었습니다.
100년이 훌쩍 흐른 지금, 그 시절 여성 문학은 여전히 우리의 심연에 잠들어 있습니다. <모던걸 시리즈>를 출간하기 위해 많은 근대 여성 작가의 글을 찾아냈고, 면밀히 살폈습니다. 작품을 선정하면서 현재 출판계의 강력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 문학의 본류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모던걸 시리즈>에 실린 모든 작품은 편집자가 직접 현대어로 번역했습니다. 원문의 뜻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현대의 독자들이 읽는 데 거리감이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과감하면서도 새로운 번역을 시도했습니다. 원문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기를 원하는 고전주의적 독자들에게는 이번 시리즈가 과감함을 넘어 함량 미달의 어떤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고귀한 소수의 문학이기보다 어떤 언어로 담기든 다수의 문학이 이 시대 독자들에게 더 유익하다고 믿습니다. 현대의 시선으로 큐레이션하고 현대의 언어로 담아낸 작품들은 분명히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작지만 긴 여운을 선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던’한 시대를 살고 있고 ‘지금 여기’의 여성 모두가 모던걸입니다. ‘모던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키워드입니다. ‘모던걸’이라 불렸던 근대 여성들은 유교적 억압에서의 해방과 표현의 자유,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했고, 이 책에 담긴 작품들은 그 흔적입니다. 여성들의 억압에 대한 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들이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첫사랑, 애정하는 것, 다정한 시골 풍경, 보고 싶은 엄마 등 정겹고 익숙한 소재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제조차 여성의 펜 끝으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탄생한 작품들이기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때의 감정들이 현재와 다르지 않음을 느낄 때 우리는 먼 시간을 뛰어넘어 강한 유대감을 느낍니다. 이 시리즈가 여전히 모던을 꿈꾸는 독자에게 기분 좋은 배부름이 되기를 원합니다.
수필집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
<모던걸 시리즈>의 수필집 『내 머릿속에 푸른 사슴』은 근대 여성작가 백신애와 노천명, 나혜석, 강경애의 진솔하고 단정한 마음이 담겨 있는 수필집이다. 네 명의 작가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관찰과 날카로운 통찰과 성찰을 감각적인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일관되게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행복’을 말한다. 달달한 신혼여행 일화부터 프랑스에서 보내는 정월,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어민들을 향한 애석하고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그 곳에서 찾아낸 작은 희망까지. 소소한 일상 속에서 찾아낸 삶의 가치가 문장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다. 그야말로 현대인이 추구하는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만한 글로 가득하다. 이들의 글이 험난하고 굴곡졌던 삶처럼 비장할 줄만 알았던 것은 착각이자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읽다보면 어느새 그들과 조잘조잘 수다 떨며 푸른 숲속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이 수필집은 네 명의 여성 작가들이 저마다 찾아낸 기쁨과 슬픔, 그리고 깨달음의 기록이다.
책 속으로
P.11 벌써 신혼이라는 그러그러한 때가 저 먼 옛날같이 되어버린 이때에 새삼스럽게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신혼 여행기를 쓰라는 주문을 받고 펜을 들게 되니 공연히 웃음만 납니다. 대체 쓸 만한 거리가 기억에 남아있어야 될 터인데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눈을 감고 여행을 했는지 좌우간 여행기가 될 만한 것이 도통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 백신애, 「슈크림」 중에서
P.51 작가란, 작품 활동에 있어서 놀고 있는 것같이 보여도 머릿속에서는 늘 바쁘게 일을 하고 있다. 무엇을 노래할지 찾고 있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이런 푸른 사슴을 자유롭게 놓아기르기 위해서는 최소한도의 생활 보장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노천명, 「직장의 변」 중에서
P.78 복잡한 현실에서 우리는 가끔 다른 데를 보며 쉴 필요가 있다. 같이 앉아 있는 방안의 사람이 보기 싫을 때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겠고, 이런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독이라든가 궁기가 낀 살림 부스러기가 아니고 모름지기 한 그루의 싸리나무다.
- 노천명, 「5월의 구상」 중에서
P.116 유럽인의 생활은 성적 생활이라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파리같이 외적 자극과 유혹이 많은 곳이 있으랴. 이들의 내면을 보면 별별 비밀이 다 있겠지만 외면만은 일부일처제로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래도 자유로운 곳에 참사랑이 있는 듯싶다.
- 나혜석,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중에서
P.131 이번에 내가 여기 온 것은 저들의 생활을 탐구하기 위함이었다. 이 부르짖음으로 가슴이 뜨겁게 흔들렸다. 오냐, 작가로서의 사명이 뭐냐. 이 현실을 누구보다도 똑똑히 보고 또 해부하여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나타내 보이는 데 있는 것 아니냐. 예술이란 그 자체가 민중의 생활과 분리되어 있으면 무슨 가치가 있으랴.
- 강경애, 「몽금포 구경」 중에서
소설집 <의심의 소녀>
〈모던걸 시리즈>의 소설집 『의심의 소녀』에는 과거 문단에 의미 있는 족적을 디뎠던 여성 작가들의 다섯 작품을 실었다. 이 소설집에 담긴 소설들은 가장 최근 작품인 「가을」을 기준으로 삼아도 80년이 지난 먼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이야기들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지고 특유의 시선으로 시대를 읽어낸 작가들의 작품은 과거의 독자뿐 아니라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깊은 의미를 남긴다. 어쩌면 각 소설은 과거의 작가가 오늘날에 보낸 편지인지도 모른다.
낡은 도덕관념을 가진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 딸, 불우한 가정사 때문에 이름을 숨기고 떠도는 소녀,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오빠마저 잃은 간호사, 죽은 아내의 친구를 만난 남편, 그리고 구시대적 관습과 오롯이 맞닥뜨려야 하는 신세대. 다섯 저자가 시대를 읽음으로써 적어낸 인물들은 어떤 의미를 전달할까.
『의심의 소녀』는 그 편지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더 선명히 전달되기를 바라 소설 원문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수정했다. 편지를 펼칠 독자들은 이 글을 통해 반갑고도 낯선 연대의 선물을 발견할 것이다.
책 속으로
P.15 그러나 이제는 으레 해야 할 말도 하기가 죄송스럽고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불평하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몸이 아플 때도 어디 아프다는 말조차 하기 미안해졌다.
병원! 약값! 모두 돈 때문이었다.
- 백신애, 「나의 어머니」 중에서
P.51 바람에 문풍지만 울려도 어머닌가, 옆집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오누이는 달려나가 어머니, 하고 문을 열면 밖에는 눈만 내렸다. 그녀가 악을 쓰고 어머니를 부르면 오빠는 그녀를 업고 방안을 빙빙 돌면서 훌쩍훌쩍 울던 그날…….
- 강경애, 「어둠」 중에서
P.70 그럴 때면 일종의 퇴폐적인 애착이 생기기도 했지만, 석재는 어쩐지 그러한 감정의 한 꺼풀 밑에 짙은 원색과도 같은, 꽤 섬뜩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석재가 우정 저편의 존재를 무시한 순간이 정예에게서 그러한 것을 본 때였다.
- 지하련, 「가을」 중에서
P.103 사랑을 원해도 얻지 못하고, 자유를 원해도 얻지 못하며, 헤어지자고 해도 듣지 않고, 의심받고 학대당하고……. 집에 갇혀 삶을 비관하던 부인은 결국 병든 몸을 일으켜 평양 별장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길바닥에서 지나치는 무수한 발걸음에 밟히는 이름 없는 작은 풀까지 꽃 피는 사월의 어느 날, 스물네 살의 젊은 부인은 그렇게 단도로 제 몸을 찔렀다.
- 김명순, 「의심의 소녀」 중에서
P.157~158 그렇다. 먹고 죽는 게 전부라면 그건 동물이나 다름이 없다. 더군다나 자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조상의 재물을 받아 가지고 스스로 뭔가 해보는 건 고사하고, 받은 것도 쓸 줄 몰라 술이나 기생에게 쓸데없이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배 두드리다가 죽는 부자들의 가정에는 별별 비참한 일이 많았다. 거의 짐승과 구별할 수도 없는 일이 많았다. 그런 자는 사람의 가죽을 잠깐 빌려 쓴 것이지, 절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저 댑싸리 그늘 밑에 드러누우려 해도 개가 비웃고 그 자리가 아깝다고 할 것이다.
- 나혜석, 「경희」 중에서
시집 <캐피털 웨이>
<모던걸 시리즈>의 시집 『캐피털 웨이』는 비교적 유명한 작가뿐 아니라 당시 신문에 실렸던 무명의 일반인 여성들의 작품도 함께 실어 다양한 주제의 시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책은 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80개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1부 ‘그대이기에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요’는 사랑의 설렘부터 이별의 아픔까지, 사랑하면서 여자가 겪는 보편적인 감정들을 다룬 시들로 구성하였다. 2부 ‘누군가 그의 손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이 주로 혼자일 때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을 담은 시로 구성하였다. 3부 ‘구름같이 왔다가는 뜻 모를 이 인생’은 인생의 덧없음이나 쓸쓸함, 그리움의 정조를 지닌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4부 ‘꽃다운 꿈이 뒹구는 서리 내린 밤풍경’은 주로 노천명의 시들로, 그 중에서도 고즈넉한 시골 풍경을 묘사하는 시가 주를 이룬다. 5부 ‘발은 땅에 딛고 있지만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는 여성들에게 모던걸이 되자고 외치는 계몽적인 시들이다. 6부 ‘언니 다시 오실 때가 꽃 필때라기에’는 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담은 시다.
책 속으로
P.15 보슬보슬 / 보슬비가 내려옵니다 / 마당 위에 / 고여 있는 물만 불리는 / 보슬보슬 / 보슬비가 내려옵니다 / 우리 둘이 껴안고 / 이 비를 맞아 / 우리의 사랑에 / 물이 고이면 / 내년 춘삼월이 / 다시 올 때에 / 우리의 헌 사랑에 / 새싹이 날 거예요
- 김명순, 「보슬비」 중에서
P.26 …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 속삭이기에는 이 나이에 겸연쩍고 /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 얘기는 일부러 딴 데로 빗나가고 /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
- 노천명, 「당신을 위해」 중에서
P.42 길바닥에 구르는 사랑아 / 배고픈 이의 입에서 굴러 나와 /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 ‘사랑’이란 거짓말아 /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 ‘사랑’이란 거짓말아 …
- 김명순, 「저주」 중에서
P.102 나무가 항상 하늘을 향하듯이 /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우리 / 별을 쳐다보면서 걸어갑시다 / 친구보다 / 좀 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 또 미운 놈을 혼내 주어 본댔자 /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 술 한 잔만도 못한 /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 발은 땅을 딛고 서 있지만 우리 / 별을 쳐다보면서 걸어갑시다
- 노천명, 「별을 쳐다보면」 중에서
P.146 울 언니 월급 타면 쓸데 많지요 / 병들은 아버지의 약사들이고 / 날마다 나가라는 집 세금 물고 /
무섭게 호령하는 전기세 물고 / 기한을 연기했던 전당물 찾고 / 두 달 거듭 밀려온 월사금 물고 /
안 먹고 살 수 없는 쌀 되나 사면 / 이달 월급 다 써도 모자란다우
- 박재관, 「울 언니 월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