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둑일기
오늘날 콘텐츠에 관련된 제일의 금기어로는 무엇이 있을까? 콘텐츠 산업에서 불법 공유와 토렌트는 제일의 금기어일 터다. 인터넷 세계에서 한때의 토렌트는 문화를 향유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스트리밍 사이트의 등장과 법적인 제재로 토렌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타인의 저작권을 도둑질하는 불법 행위라는 이유에서였다. 한민수의 『영화도둑일기』는 약탈과 해적질, 도둑질로 규정되는 토렌트 사용의 의미를 반전한다. 비전문 영화 애호가를 자처하는 한민수는 영화제와 시네마테크의 특별 프로그램이 아니면 평생 보지 못할 영화들을 발굴하고 유포한다. 영화 제도의 간택을 받지 못하면 관객에게 선볼 기회를 얻지 못하는 영화들이 비로소 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것이다. 한민수에 따르면 해적질은 영화를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영화도둑일기』에는 콘텐츠 산업의 권역 밖에서 작가 본인이 은밀히 행하는 영화도둑질 이야기부터, 자발적으로 수백 개의 자막을 만드는 자막 제작자, 영화도둑계의 전설적인 인물과의 인터뷰까지, 동시대 영화광들의 삶이 들어 있다. 한민수는 동시대 ‘시네필’(영화애호가를 일컫는 프랑스어 명칭)들이 영화와 맺는 관계를 조명한다. 동시에 『영화도둑일기』는 ‘콘텐츠 산업’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배제당하는 영화들이 생존하는 방법을 다룬다. 영화를 도둑질하고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새로운 공동체는 콘텐츠 산업에서 환영받을 수 없다. 또, 상품성이 없는 예술 작품은 상영될 권리도 박탈당한 채로 추방당한다. 이 책은 동시대 문화예술계에서 추방당한 자들이 조우하는 풍경을 눈앞에서 보듯 생생히 그려낸다.
목차
[서문]
I.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
1. 정품이라는 신화
2. 해적들의 도시
3. 아카이브의 도둑들
4. 성배의 기사들
5. 일상적인 즐거움
II. 인터뷰
1. 영화 열정: 씨네스트의 전설, umma55를 만나다
2. 기인들 (1): P에 대한 인터뷰
3. 기인들 (2): 슈뢰딩거볼스의 이상한 경우
[에필로그]
[해제] 저작권의 밤과 안개 - 강덕구
책 속으로
"지적 재산권 같은 건 없다.—장 뤽 고다르
이 표현이 겸연쩍기는 하지만 나는 해적이다. 내가 하는 일들은, 누군가는 법외 행위라고 포장하기도 하지만 법적으로 따져 본다면 명백히 불법적인 일들이다. 가령, 나는 비공개 영화 토렌트 사이트 카라가르가(Karagarga)에서 사람들이 요청하는 영화 자료들을 구해서 업로드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요청하는 영화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고, 그런 영화들을 구하기 위해 해외의 중고 시장을 찾아보거나, 이런저런 아카이브에 직접 방문해 보안의 허점을 찾거나, 심지어는 극장에 방문해서 상영되는 화면을 휴대폰으로 몰래 찍어 ‘캠버전’을 제작하거나 하는 여러 가지 밀수 행위들이 개입한다. 나는 고소의 위험 때문에 이 모든 행위를 소상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내가 이런 방식으로 밀수한 몇몇 영화들은 나로 인해 세상 바깥에 실상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작품들도 존재하고, 우부웹(UbuWeb)과 같은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내가 업로드한 영화들을 역으로 밀수해 가기도 했다는 점 정도만 언급해 두겠다." (5페이지)
"해외의 영화 웹진 《센스 오브 시네마》에서는 2023년 봄, 105호의 주제를 “영화 해적질(film piracy)” 특집으로 편성했다. 이런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해외의 사정과 별개로, 한국에서는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 거의 금기시되는 분위기였다. 이를테면 몇 년 전, 어떤 SNS에서 누군가가 한국의 자막 사이트 씨네스트가 사라지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썼다가 어떤 영화잡지의 기자로부터 웃음도 안 나온다느니, 저런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들어 본다고 공격받은 적이 있었다. 저작권은 창작자를 위한 것이라는 걸 주지시키기 위해 어린이백과사전까지 인용한 그 기자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더 얹고 싶지는 않다. 또한, 나는 누군가가 해적질이 영화 ‘산업’을 망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굳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책이 겨냥하고 있는 시퀀스가 애초에 그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히려 해적질이 만들어 내는 틈새를 포착하고, 그 틈새가 만들어 내는 문화를 전파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9페이지)
"그러니까 결론은 이곳은 그냥… 무법지대다. 이런 실정에 거의 신화에 가까운 존재나 다름없는 정품과 굿다운로드를 이야기하고, 씨네스트의 존재를 마냥 부정하는 것은 사실 난센스나 다름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이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 그렇게 돈을 버는 이들 대부분은 영화 창작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고, 라이선스를 정식으로 취득한 이들도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그 어떠한 크레딧이나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14시간이 넘는 긴 영화를 번역하고, 이를 공유하고 있는 씨네스트의 자막 제작자들이 있다. 당신은 어디에?" (23페이지)
"이 사이트에는 영화 연구자, 비평가, 영화제 프로그래머 등도 다수가 활동 중인데, 가령, 국내에도 번역된 『존 포드』(이모션북스, 2018)의 저자 태그 갤러거도 카라가르가의 열성적인 회원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존 포드』의 프랑스어 판본을 카라가르가에 업로드하기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귀한 필름들을 스캔한 후 DVD로 변환해 올리기도 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는 16mm 필름들을 여러 영화제들에 대여해 주고 그걸로 돈을 벌기도 했었던 인물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걸 보면 과연 프로페셔널한 밀수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취향이 확고한 그는 주로 60년대 이전의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들을 주로 받아 가는데, 그가 받아 간 영화들을 나란히 감상하는 것도 썩 괜찮은 영화 감상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1페이지)
"아무튼, 이전에는 비공개 트래커에서의 대부분의 공유가 ‘DVD’나 ‘블루레이’ 같은 물리 매체들을 통한 사적인 소유권에 기반하고 있었다면, 요즘에는 ‘Web-DL’, 웹 다운로드 방식이 굉장히 많아졌다. 어떤 외화의 “해외 개봉 국내 개봉 2차 시장(물리 매체, VOD) 리핑 영상/자막 공유”와 같은 기존의 공급사슬은, OTT 또는 온라인 영화제로 인하여 작품의 공개와 동시에 영상과 자막이 함께 유포됨에 따라 대폭 단축 되었다. 비공개 트래커 내에서도 온라인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DRM을 해제해 업로드하는 것이 선공개(pre-release)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어떤 온라인 상영 행사로 인해 비메오에 잠깐 올라온 말레나 슬람의 신작을 업로드했다가 감독의 대리인으로부터 ‘해당 작품이 아직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내려 줄 수 있느냐’는 (몹시 정중한)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가이드라인이 마련된 것은 아닌 듯하지만, 결국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작품들은 업로더들이 알아서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올리자고 잠정적으로 합의가 된 듯하다." (45페이지)
"실제로 많은 시네필들의 생애 주기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해서 취업전선으로 뛰어드는 시기까지인 것 같다. 물론 계속해서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많은 경우 영화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고,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다수가 사라진다. (당신이 이 케이스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부디 사라지지 말아주시기를 바란다…) 심지어는 영화와 관련된 학과를 나와, 비평이나 다른 활동을 하며 몇 가지 족적을 남긴 이들도 많은 경우가 이탈해 버리는데, 이에 대해선 《마테리알》의 공개서한이 잘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에게 있어서 영화는 직업은 아니므로, 굳이 말하자면 하나의 취미다." (61페이지)
"하모니 코린은 〈구모Gummo〉(1997)를 만들면서 ‘아무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만들지 않아서 내가 직접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아무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들을 틀지 않았기에 직접 영화를 수급해 상영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친구가 운영하는 대학 내 시네클럽에 객원 프로그래머 비슷한 신분으로 꼽사리를 껴서 이런저런 ‘공식’ 상영회를 조직했다. 어떠한 지원금도 받지 않고, 개인 사비와 상영하는 작품에 관심이 있던 지인 몇 분의 지원을 바탕으로 마츠모토 토시오, 필 솔로몬, 스탠 브래키지, 호세 안토니오 시스티아가, 정재훈 등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상영했다. 프로그램이 실험영화 위주로 짜여진 것은 순전히 이들을 볼 수 있는 경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권이 부여된 탓이다. (나는 일반 장편 극영화들도 함께 상영하고 싶었는데, 이들은 대여료가 상당해 지원을 받지 않는 일개 시네클럽에서 공식적으로 상영하기에는 다소 벅찬 감이 있었다)" (65페이지)
"배우 팬심으로 번역한 작품이 다 걸작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상당히 러블리한 것만 해요. 아주 폭망한 건 안 해요. (웃음) 아무리 팬이라도 시간이 너무 아까우니까요. 어느 정도 기준치는 있어야죠. 제가 다양한 영화를 본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는데, 처음엔 이상했어요. 내가 다양하게 보는 건가? 나는 내가 표준이라고 생각하는데. (웃음) 누가 그랬다잖아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영화도 그래요. 세상에 200개가 넘는 국가가 있는데, 다들 자기 나름대로 영화를 만들고 있잖아요. 시시하든 아니든. 근데 왜 우리가 미국 할리우드 영화 혹은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서구 영화만 봐야 하냐 이거죠. 안 봐서 놓치는 영화가 너무 아깝잖아요." (인터뷰, 83페이지)
"슬슬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자막을 번역하고 또 그걸 무상으로 공유하고, 그 근간에 있는 멘탈리티는 무엇일까요?
음, 첫 번째로는 나 자신의 우울증 예방, 일종의 소일거리? 소일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자막을 만들기 전까지 저는 주로 남이 만들어 놓은 걸 즐겼어요.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니까 집에서 음악을 듣는다든가 영화를 본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이 세 가지를 평생 했죠. 민수 님은 젊어서 모를 수도 있는데, 내 나이쯤 되면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가 고민이거든요. 그런데 그 세 가지만 하고 있으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남이 해 놓은 걸 즐기기만 하는 거니까요. 자막 번역은 달랐어요. 내가 하는 것, 내가 만들어 내는 거잖아요. 어떻게 말하면 일종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게 굉장한 보상이 돼요. 나 자신한테 보상이 커요.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남이 해 놓은 걸 5시간 보는 거랑, 내가 5시간 동안 뭔가를 만드는 거랑은 천지 차이예요. 그게 제일 큰 이유예요." (인터뷰, 100페이지)
"가령 레터박스에는 ‘essie’라는 닉네임을 쓰는 네임드 유저가 있습니다. 아마 아실 텐데요. 이분은 제가 알기로 여성인데, 전 세계의 필름 아카이브를 돌아다니면서 필름으로 된 실험영화들을 본다고 들었어요. 대개는 그런 아카이브들에 사전 연락을 취해서 특정 시간대에 약속을 잡으면, 기관의 영사기사들이 해당 시간대에 작품들을 보여 주는 거죠. 기본적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일이고, 기관들이 꼭 무료로 보여 주지도 않을 테니 단순히 취미로 하기에는 상당히 값비싼 취미죠. 그래서 레터박스에 그분 혼자만 본 영화들도 굉장히 많아요. 당연히 일반적으로는 볼 방법이 없는 어디 아카이브의 필름 통 속에 묻혀 있는 작품들이니까요. 그런데 ‘essie’라는 분이 실험영화를 연구하는 전문 연구자나 큐레이터는 아니라고 들었거든요. 단순히 애호가일 텐데, 그런 열정이 있는 애호가들의 눈은 신뢰할 만하죠." (인터뷰, 117페이지)
"그러던 어느 날, 모 기관의 아카이브에서 노동자뉴스제작단이 만든 다큐멘터리들을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는 떳떳하지 않은 어둠의 경로로 그들을 하나둘씩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탕정벌에 다시 서다〉(1998)라는 다큐멘터리를 발견했다. 이 작품은 나의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약간 흥분된 상태로 작품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해당 다큐멘터리에는 아버지의 동료들인, 투쟁하는 회사 노동자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사원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이 다큐멘터리의 등장인물들은 내가 일상에서 평소에 얼굴을 마주하는, 나의 옆집에 사는 이웃들이나 다름없었다. 네트워크를 항해하는 해적이었던 내가 해적질을 하던 중에 예기치 않게 현실과 대면하게 되니,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들뢰즈 혹은 정성일 선생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에필로그, 139페이지)
"한민수가 쓴 『영화도둑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해적질은 보존이다.” 이는 희귀 영화를 해적질함으로써 영화기관이나 영화사의 하드에 갇혀 있는 영화를 더욱 많이 산포해 보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이를 해석하려고 한다. 영화적 경험을 소유하려면 공유해야 한다. 영화를 완벽히 기억하려면 영화를 본 다른 관객의 기억과 만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한민수의 글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단순히 그의 글이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동시대의 시네필리아를 옛날의 시네필리아와 비교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도둑일기』는 한 영화를 온전히 소유하려면 다른 기억과 만나야 한다는, 영화적 경험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민수에게 해적질이란 시네필들이 서로의 기억에 접속하는 행위다. 한민수의 꿈은 더욱 많이 영화를 공유해 더 많은 기억을 만드는 데 있다." (해제, 강덕구, 147페이지)
작가 소개
한민수
비전문 영화 애호가. 영화에 대한 수많은 기억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여러 영화들을 한국어로 옮겨 인터넷에 자막을 배포했고, 동료들과 함께 여러 공간에서 공동체 상영을 조직하고 있다. 지금까지 마츠모토 토시오, 필 솔로몬, 호세 안토니오 시스티아가, 만다 쿠니토시의 작품 상영회를 기획했다.
영화도둑일기
오늘날 콘텐츠에 관련된 제일의 금기어로는 무엇이 있을까? 콘텐츠 산업에서 불법 공유와 토렌트는 제일의 금기어일 터다. 인터넷 세계에서 한때의 토렌트는 문화를 향유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스트리밍 사이트의 등장과 법적인 제재로 토렌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타인의 저작권을 도둑질하는 불법 행위라는 이유에서였다. 한민수의 『영화도둑일기』는 약탈과 해적질, 도둑질로 규정되는 토렌트 사용의 의미를 반전한다. 비전문 영화 애호가를 자처하는 한민수는 영화제와 시네마테크의 특별 프로그램이 아니면 평생 보지 못할 영화들을 발굴하고 유포한다. 영화 제도의 간택을 받지 못하면 관객에게 선볼 기회를 얻지 못하는 영화들이 비로소 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것이다. 한민수에 따르면 해적질은 영화를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영화도둑일기』에는 콘텐츠 산업의 권역 밖에서 작가 본인이 은밀히 행하는 영화도둑질 이야기부터, 자발적으로 수백 개의 자막을 만드는 자막 제작자, 영화도둑계의 전설적인 인물과의 인터뷰까지, 동시대 영화광들의 삶이 들어 있다. 한민수는 동시대 ‘시네필’(영화애호가를 일컫는 프랑스어 명칭)들이 영화와 맺는 관계를 조명한다. 동시에 『영화도둑일기』는 ‘콘텐츠 산업’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배제당하는 영화들이 생존하는 방법을 다룬다. 영화를 도둑질하고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새로운 공동체는 콘텐츠 산업에서 환영받을 수 없다. 또, 상품성이 없는 예술 작품은 상영될 권리도 박탈당한 채로 추방당한다. 이 책은 동시대 문화예술계에서 추방당한 자들이 조우하는 풍경을 눈앞에서 보듯 생생히 그려낸다.
목차
[서문]
I. 해적질의 옹호와 현양
1. 정품이라는 신화
2. 해적들의 도시
3. 아카이브의 도둑들
4. 성배의 기사들
5. 일상적인 즐거움
II. 인터뷰
1. 영화 열정: 씨네스트의 전설, umma55를 만나다
2. 기인들 (1): P에 대한 인터뷰
3. 기인들 (2): 슈뢰딩거볼스의 이상한 경우
[에필로그]
[해제] 저작권의 밤과 안개 - 강덕구
책 속으로
"지적 재산권 같은 건 없다.—장 뤽 고다르
이 표현이 겸연쩍기는 하지만 나는 해적이다. 내가 하는 일들은, 누군가는 법외 행위라고 포장하기도 하지만 법적으로 따져 본다면 명백히 불법적인 일들이다. 가령, 나는 비공개 영화 토렌트 사이트 카라가르가(Karagarga)에서 사람들이 요청하는 영화 자료들을 구해서 업로드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요청하는 영화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작품들이 많고, 그런 영화들을 구하기 위해 해외의 중고 시장을 찾아보거나, 이런저런 아카이브에 직접 방문해 보안의 허점을 찾거나, 심지어는 극장에 방문해서 상영되는 화면을 휴대폰으로 몰래 찍어 ‘캠버전’을 제작하거나 하는 여러 가지 밀수 행위들이 개입한다. 나는 고소의 위험 때문에 이 모든 행위를 소상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내가 이런 방식으로 밀수한 몇몇 영화들은 나로 인해 세상 바깥에 실상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작품들도 존재하고, 우부웹(UbuWeb)과 같은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아카이브 사이트에서 내가 업로드한 영화들을 역으로 밀수해 가기도 했다는 점 정도만 언급해 두겠다." (5페이지)
"해외의 영화 웹진 《센스 오브 시네마》에서는 2023년 봄, 105호의 주제를 “영화 해적질(film piracy)” 특집으로 편성했다. 이런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해외의 사정과 별개로, 한국에서는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 거의 금기시되는 분위기였다. 이를테면 몇 년 전, 어떤 SNS에서 누군가가 한국의 자막 사이트 씨네스트가 사라지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썼다가 어떤 영화잡지의 기자로부터 웃음도 안 나온다느니, 저런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들어 본다고 공격받은 적이 있었다. 저작권은 창작자를 위한 것이라는 걸 주지시키기 위해 어린이백과사전까지 인용한 그 기자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더 얹고 싶지는 않다. 또한, 나는 누군가가 해적질이 영화 ‘산업’을 망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굳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책이 겨냥하고 있는 시퀀스가 애초에 그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히려 해적질이 만들어 내는 틈새를 포착하고, 그 틈새가 만들어 내는 문화를 전파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9페이지)
"그러니까 결론은 이곳은 그냥… 무법지대다. 이런 실정에 거의 신화에 가까운 존재나 다름없는 정품과 굿다운로드를 이야기하고, 씨네스트의 존재를 마냥 부정하는 것은 사실 난센스나 다름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이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 그렇게 돈을 버는 이들 대부분은 영화 창작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고, 라이선스를 정식으로 취득한 이들도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그 어떠한 크레딧이나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14시간이 넘는 긴 영화를 번역하고, 이를 공유하고 있는 씨네스트의 자막 제작자들이 있다. 당신은 어디에?" (23페이지)
"이 사이트에는 영화 연구자, 비평가, 영화제 프로그래머 등도 다수가 활동 중인데, 가령, 국내에도 번역된 『존 포드』(이모션북스, 2018)의 저자 태그 갤러거도 카라가르가의 열성적인 회원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존 포드』의 프랑스어 판본을 카라가르가에 업로드하기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희귀한 필름들을 스캔한 후 DVD로 변환해 올리기도 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는 16mm 필름들을 여러 영화제들에 대여해 주고 그걸로 돈을 벌기도 했었던 인물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걸 보면 과연 프로페셔널한 밀수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취향이 확고한 그는 주로 60년대 이전의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들을 주로 받아 가는데, 그가 받아 간 영화들을 나란히 감상하는 것도 썩 괜찮은 영화 감상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1페이지)
"아무튼, 이전에는 비공개 트래커에서의 대부분의 공유가 ‘DVD’나 ‘블루레이’ 같은 물리 매체들을 통한 사적인 소유권에 기반하고 있었다면, 요즘에는 ‘Web-DL’, 웹 다운로드 방식이 굉장히 많아졌다. 어떤 외화의 “해외 개봉 국내 개봉 2차 시장(물리 매체, VOD) 리핑 영상/자막 공유”와 같은 기존의 공급사슬은, OTT 또는 온라인 영화제로 인하여 작품의 공개와 동시에 영상과 자막이 함께 유포됨에 따라 대폭 단축 되었다. 비공개 트래커 내에서도 온라인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의 DRM을 해제해 업로드하는 것이 선공개(pre-release)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어떤 온라인 상영 행사로 인해 비메오에 잠깐 올라온 말레나 슬람의 신작을 업로드했다가 감독의 대리인으로부터 ‘해당 작품이 아직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내려 줄 수 있느냐’는 (몹시 정중한)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가이드라인이 마련된 것은 아닌 듯하지만, 결국 영화제 서킷을 돌고 있는 작품들은 업로더들이 알아서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올리자고 잠정적으로 합의가 된 듯하다." (45페이지)
"실제로 많은 시네필들의 생애 주기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해서 취업전선으로 뛰어드는 시기까지인 것 같다. 물론 계속해서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많은 경우 영화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고, 영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다수가 사라진다. (당신이 이 케이스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부디 사라지지 말아주시기를 바란다…) 심지어는 영화와 관련된 학과를 나와, 비평이나 다른 활동을 하며 몇 가지 족적을 남긴 이들도 많은 경우가 이탈해 버리는데, 이에 대해선 《마테리알》의 공개서한이 잘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에게 있어서 영화는 직업은 아니므로, 굳이 말하자면 하나의 취미다." (61페이지)
"하모니 코린은 〈구모Gummo〉(1997)를 만들면서 ‘아무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만들지 않아서 내가 직접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아무도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들을 틀지 않았기에 직접 영화를 수급해 상영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친구가 운영하는 대학 내 시네클럽에 객원 프로그래머 비슷한 신분으로 꼽사리를 껴서 이런저런 ‘공식’ 상영회를 조직했다. 어떠한 지원금도 받지 않고, 개인 사비와 상영하는 작품에 관심이 있던 지인 몇 분의 지원을 바탕으로 마츠모토 토시오, 필 솔로몬, 스탠 브래키지, 호세 안토니오 시스티아가, 정재훈 등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상영했다. 프로그램이 실험영화 위주로 짜여진 것은 순전히 이들을 볼 수 있는 경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권이 부여된 탓이다. (나는 일반 장편 극영화들도 함께 상영하고 싶었는데, 이들은 대여료가 상당해 지원을 받지 않는 일개 시네클럽에서 공식적으로 상영하기에는 다소 벅찬 감이 있었다)" (65페이지)
"배우 팬심으로 번역한 작품이 다 걸작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상당히 러블리한 것만 해요. 아주 폭망한 건 안 해요. (웃음) 아무리 팬이라도 시간이 너무 아까우니까요. 어느 정도 기준치는 있어야죠. 제가 다양한 영화를 본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는데, 처음엔 이상했어요. 내가 다양하게 보는 건가? 나는 내가 표준이라고 생각하는데. (웃음) 누가 그랬다잖아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영화도 그래요. 세상에 200개가 넘는 국가가 있는데, 다들 자기 나름대로 영화를 만들고 있잖아요. 시시하든 아니든. 근데 왜 우리가 미국 할리우드 영화 혹은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서구 영화만 봐야 하냐 이거죠. 안 봐서 놓치는 영화가 너무 아깝잖아요." (인터뷰, 83페이지)
"슬슬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자막을 번역하고 또 그걸 무상으로 공유하고, 그 근간에 있는 멘탈리티는 무엇일까요?
음, 첫 번째로는 나 자신의 우울증 예방, 일종의 소일거리? 소일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자막을 만들기 전까지 저는 주로 남이 만들어 놓은 걸 즐겼어요.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니까 집에서 음악을 듣는다든가 영화를 본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이 세 가지를 평생 했죠. 민수 님은 젊어서 모를 수도 있는데, 내 나이쯤 되면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가 고민이거든요. 그런데 그 세 가지만 하고 있으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남이 해 놓은 걸 즐기기만 하는 거니까요. 자막 번역은 달랐어요. 내가 하는 것, 내가 만들어 내는 거잖아요. 어떻게 말하면 일종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게 굉장한 보상이 돼요. 나 자신한테 보상이 커요. 같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남이 해 놓은 걸 5시간 보는 거랑, 내가 5시간 동안 뭔가를 만드는 거랑은 천지 차이예요. 그게 제일 큰 이유예요." (인터뷰, 100페이지)
"가령 레터박스에는 ‘essie’라는 닉네임을 쓰는 네임드 유저가 있습니다. 아마 아실 텐데요. 이분은 제가 알기로 여성인데, 전 세계의 필름 아카이브를 돌아다니면서 필름으로 된 실험영화들을 본다고 들었어요. 대개는 그런 아카이브들에 사전 연락을 취해서 특정 시간대에 약속을 잡으면, 기관의 영사기사들이 해당 시간대에 작품들을 보여 주는 거죠. 기본적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일이고, 기관들이 꼭 무료로 보여 주지도 않을 테니 단순히 취미로 하기에는 상당히 값비싼 취미죠. 그래서 레터박스에 그분 혼자만 본 영화들도 굉장히 많아요. 당연히 일반적으로는 볼 방법이 없는 어디 아카이브의 필름 통 속에 묻혀 있는 작품들이니까요. 그런데 ‘essie’라는 분이 실험영화를 연구하는 전문 연구자나 큐레이터는 아니라고 들었거든요. 단순히 애호가일 텐데, 그런 열정이 있는 애호가들의 눈은 신뢰할 만하죠." (인터뷰, 117페이지)
"그러던 어느 날, 모 기관의 아카이브에서 노동자뉴스제작단이 만든 다큐멘터리들을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나는 떳떳하지 않은 어둠의 경로로 그들을 하나둘씩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탕정벌에 다시 서다〉(1998)라는 다큐멘터리를 발견했다. 이 작품은 나의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약간 흥분된 상태로 작품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해당 다큐멘터리에는 아버지의 동료들인, 투쟁하는 회사 노동자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사원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이 다큐멘터리의 등장인물들은 내가 일상에서 평소에 얼굴을 마주하는, 나의 옆집에 사는 이웃들이나 다름없었다. 네트워크를 항해하는 해적이었던 내가 해적질을 하던 중에 예기치 않게 현실과 대면하게 되니,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들뢰즈 혹은 정성일 선생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에필로그, 139페이지)
"한민수가 쓴 『영화도둑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해적질은 보존이다.” 이는 희귀 영화를 해적질함으로써 영화기관이나 영화사의 하드에 갇혀 있는 영화를 더욱 많이 산포해 보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이를 해석하려고 한다. 영화적 경험을 소유하려면 공유해야 한다. 영화를 완벽히 기억하려면 영화를 본 다른 관객의 기억과 만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한민수의 글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단순히 그의 글이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동시대의 시네필리아를 옛날의 시네필리아와 비교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도둑일기』는 한 영화를 온전히 소유하려면 다른 기억과 만나야 한다는, 영화적 경험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민수에게 해적질이란 시네필들이 서로의 기억에 접속하는 행위다. 한민수의 꿈은 더욱 많이 영화를 공유해 더 많은 기억을 만드는 데 있다." (해제, 강덕구, 147페이지)
작가 소개
한민수
비전문 영화 애호가. 영화에 대한 수많은 기억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여러 영화들을 한국어로 옮겨 인터넷에 자막을 배포했고, 동료들과 함께 여러 공간에서 공동체 상영을 조직하고 있다. 지금까지 마츠모토 토시오, 필 솔로몬, 호세 안토니오 시스티아가, 만다 쿠니토시의 작품 상영회를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