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행위성의 예술
출간되자마자 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으며 2021년 미국철학협회 도서상을 수상한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 출간되었다. 게임이라는 고유한 예술 형식에 깃든 가치를 밝히는 이 책은 우리의 행위성은 물론 사회성, 자율성,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수는 신선한 통찰을 제공한다.
게임은 정말 미련하게 시간을 버리는 일인가?
다른 활동에 비해 게임은 부차적으로 보인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몇 시간이고 애를 쓰면서 한다는 것이 고작 누군가 고안한 조작된 활동에서 서로를 이겨 먹는 일이다. 가령 어떤 비디오게임은 조그만 버섯 인간들 위로 뛰어올라 사정없이 짓밟으라 지시한다. 그러면 우리는 곧 누구보다도 빨리, 더 많이 짓밟기 위해 그 일에 몰두한다.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전시회를 가거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이는 게임 고유의 동기 구조를 간과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우리가 게임 고유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미술이나 음악 못지않게 게임 역시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예술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게임의 범위와 종류는 폭넓다. 컴퓨터게임, 팀 스포츠, 단독 스포츠, 보드게임, 카드 게임, 파티 게임,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 행위 기반 롤플레잉 게임 등에 대한 여러 심층 사례를 포함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게임 플레이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게임이 행위성의 예술이자 사회적 예술임을 밝히는 데 핵심인 플레이, 즉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를 집중해서 다룬다. ‘분투형’ 플레이란, 간단히 말해서 게임을 하는 진짜 목적이 승리가 아닌 게임을 하는 과정 자체에 있는 플레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마피아 게임을 할 때 우리의 진짜 목적은 여럿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게임이 즐겁기 위해서는, 승리라는 일시적 목표를 진심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트위스터」 게임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모두가 균형을 잃고 와르르 무너지는 ‘실패’에 있지만, 그 원하는 실패의 경험을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전력으로 ‘성공’을 추구해야 한다.
게임이 예술이라 주장하는 그동안의 논의는 주로 다른 종류의 예술이 줄 수 있는 미적, 예술적 가치를 게임도 줄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주력해 왔다. 저자의 접근법은 다르다. 게임은 여러 측면에서 전통적인 예술 작품과 같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이 줄 수 없는 독자적인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이라 주장한다. 가령 음악이 ‘소리’를 매체로 삼는 예술이라면 게임은 우리의 ‘행위성’을 매체로 삼는 예술이며, 게임 디자이너는 이를 이용해 일시적인 실천적 행위성과 실천적 환경을 창조해 내는 예술가다. 우리는 게임을 통해 게임 디자이너가 게임에 기입해 둔 행위성을 몸에 걸치고 그에 적절한 행위성과 자율성을 계발해 나갈 수 있다. 예컨대 「테트리스」를 플레이하며 여행에 알맞게 재빨리 짐을 싸는 행위성을 익힐 수도 있고, 질문과 답을 통해 누가 스파이인지 알아내야 하는 「스파이폴」을 통해서는 헛소리와 진실을 분간해 내는 행위성을 습득할 수도 있다.
나아가 저자는 이러한 게임의 행위적 조종 능력이 가져오는 사회적・ 도덕적 결과에 주목하며, 행위성을 매체로 삼는다는 사실 자체가 게임에 부여하는 엄청난 약속과 위협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보기에 사회적으로 문제 삼는 게임의 폭력적, 성적 재현의 문제는 협소한 사항이다. 중대한 위협은 게임이 약속하는 가치의 단순화와 도덕적 명료성이 현실 세계로 옮겨올 때 생긴다. 우리는 이미 일상을 게임화하고 인생 목표를 도구화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건강 관련 앱들은 하루 걸음 수를 수치화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보상과 경쟁 체계를 제공한다. 우버는 더 많은 거리를 운전한 드라이버에게 배지를 제공하며 디즈니는 접객 노동을 게임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명시적인 게임화 체계는 이미 아마존 같은 기업은 물론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도입되어 왔다. 하다 못해 학자들의 학술 활동에 따라붙는 논문 인용 수와 영향력 지수는, 아무래도 게임 점수처럼 보인다. 저자는 이러한 모든 특성들이 게임 속 행위적 유동성에서는 결정적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도덕적, 사회적 재앙을 불러올 수 있으며,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야말로 삶을 게임처럼 만드는 도덕적 명료성의 환상에 맞설 방책이라 말한다.
그래서 과연, 게임은 그저 시간을 낭비하는 짓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예술일까. 저술가이자 번역가 가트야 베렌스가 말했듯, “행위성에 대한 응우옌의 생각이 맞는지 보려면, 아마 게임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기려고 애쓰는 대신, 이 책에서 배운 대로 분투를 즐기면서 말이다. 이 책을 길잡이 삼아 여러분도 동참하길 바란다.”
목차
1장 행위성이라는 예술
1부 게임과 행위성
2장 분투형 플레이의 가능성
3장 행위성의 층위들
4장 게임과 자율성
2부 행위성과 예술
5장 행위성의 미학
6장 틀에 짜인 행위성
7장 게임에서의 거리
3부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변화
8장 사회적 변화로서 게임
9장 게임화와 가치 포획
10장 분투의 가치
감사의 말
역자 후기
참고 문헌
찾아보기
책 속으로
회화가 시각을, 음악이 소리를, 이야기가 서사를 기록하게 해 준다면, 게임은 행위성을 기록한다. 이는 우리가 성장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치 소설이 살아 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해 주듯, 게임은 혼자서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여러 행위성 형식을 경험하게 해 준다. 다만 그렇게 형성된 행위성 경험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마치 예술처럼 말이다.
게임의 규칙이 무언가를 추구하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령 어떤 보드게임은 같은 색의 토큰을 모으는 데 관심을 쏟으라고 지시한다. 어떤 비디오게임은 조그만 버섯 인간들 위로 뛰어올라 짓밟는 일에 관심을 쏟으라고 지시한다. 어떤 스포츠는 공을 그물에 넣으라고 지시한다. 우리는 플레이에 몰입하게 되는 그 귀중한 상태에 이르고자 이러한 목표가 잠시 의식을 사로잡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받아들일 목표와 능력을 게임 디자이너가 특정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게임을 독자적인 예술 형식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먹고살라고 시키니, 우리는 직업을 찾고 그걸 즐기는 척해야만 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애정을 나눌 파트너를 찾으라고 시키니, 우리는 재치를 갖추는 방법을, 아니면 적어도 그럴싸한 온라인 데이트 프로필을 작성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세상은 만약 철학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면 아무리 지겹더라도 끝없는 학생들의 과제를 채점하라고 시킨다. 그러니 우리는 고개를 처박고 일하며 견뎌 나간다. 반면 게임에서는, 우리가 참여하고자 하는 바로 그 종류의 실천적 활동을 스스로 조형한다.
게임에서 가치들은 명료하고, 또렷이 제시되며, 모든 행위자에게 균일하게 부여된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한 도덕적 위험을 야기하기도 한다. 폭력적인 그래픽을 가진 게임만이 아니라 모든 게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치란 명료하고, 또렷이 드러나며, 어떤 상황에서든 균일해야 한다는 잘못된 기대를 거꾸로 현실에 끌어올 위험이다. 즉 게임은 도덕적 명료성이라는 환상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게임 플레이가 특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반대항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직접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어의 경우, 설령 게임 내 목표들에 대해 그때그때 커다란 헌신을 보일 수 있다고 해도, 그러한 게임 내 목표들에 대해 전반적으로는 무심해야 한다.(그래서 우리가 “내 마음 가지고 장난치지 마”[Don’t play games with my heart]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화를 경험하려면 그것을 정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뒤에서 보거나 냄새 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회화 작품은 정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규칙은 회화란 ‘무엇인지’에 관해 중요한 점을 나타낸다. 즉, 그것이 그저 캔버스 위의 물감이라는 물질적 사물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규칙이 공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실천 속에 공통적으로 준수된다는 사실은 특정한 공동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게임 또한 이러한 종류의 작품으로서, 한 발은 재료에, 또 한 발은 사회적 실천에 걸쳐 놓고 있는 셈이다.
예술 제도론은 기본적으로 ‘예술’이란 예술계라는 사회 역사적 제도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가 ‘예술’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관한 사회 언어학적 진실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 기댄다고 해서 정말 중요한 질문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비디오게임이 예술이냐고 무언가 다급하게 물어올 때, 그들이 특정한 사회적 제도가 실제로 게임을 받아들였는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임은 대안적인 사회적 배치와 대안적인 정치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게임은 우리로 하여금 디자인된 사회적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게임이야말로 사회적 예술의 원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멀티플레이어 게임, 보드게임, 파티 게임 등을 포함하여 매우 다양한 게임을 넓게 살펴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만일 내가 하루 휴가를 내고 아들을 동물원에 데리고 갈 경우 내 아이가 느낄 행복의 가치와 그 하루를 연구에 쓸 경우의 가치를 대체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또 대체 어떻게 내가 이것들을 이민자들의 부당한 구금에 대한 항의 시위에 참여하는 것의 중요성과 비교하겠는가? 내가 가족, 철학, 다양한 정치적 의제들에 부여하는 가치는 모두 비교하기 극히 어렵다. 게임에서는 복수의 가치를 통약함에 있어 그러한 어려움이 거의 없다. 많은 게임의 경우 목표는 단 하나이다.
게임의 윤리적 중요성과 사회적 위험에 관한 논의들은 주로 게임이 폭력적, 성적 콘텐츠를 담고 있는지에 집중해 왔다. 나는 그보다 게임 및 게임 같은 체계가 단순화·수량화된 목표의 무반성적인 추구의 확산을 부추긴다는 점을 훨씬 더 우려한다. 나는 게임이 연쇄살인범보다 월스트리트의 투기꾼을 양성하리라는 점을 더 우려한다.
작가 소개
C. 티 응우옌
유타 대학교 철학과 부교수.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회 구조와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합리성과 행위성을 형성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는 그의 글은 게임을 비롯하여 전문 지식, 집단 행위자, 커뮤니티 예술, 문화 전용, 미적 가치, 에코체임버, 매체 선정성, 신뢰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한때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음식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게임: 행위성의 예술
출간되자마자 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으며 2021년 미국철학협회 도서상을 수상한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이 출간되었다. 게임이라는 고유한 예술 형식에 깃든 가치를 밝히는 이 책은 우리의 행위성은 물론 사회성, 자율성,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수는 신선한 통찰을 제공한다.
게임은 정말 미련하게 시간을 버리는 일인가?
다른 활동에 비해 게임은 부차적으로 보인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몇 시간이고 애를 쓰면서 한다는 것이 고작 누군가 고안한 조작된 활동에서 서로를 이겨 먹는 일이다. 가령 어떤 비디오게임은 조그만 버섯 인간들 위로 뛰어올라 사정없이 짓밟으라 지시한다. 그러면 우리는 곧 누구보다도 빨리, 더 많이 짓밟기 위해 그 일에 몰두한다.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전시회를 가거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이는 게임 고유의 동기 구조를 간과한 데서 오는 오해이다. 우리가 게임 고유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미술이나 음악 못지않게 게임 역시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예술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게임의 범위와 종류는 폭넓다. 컴퓨터게임, 팀 스포츠, 단독 스포츠, 보드게임, 카드 게임, 파티 게임,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 행위 기반 롤플레잉 게임 등에 대한 여러 심층 사례를 포함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게임 플레이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게임이 행위성의 예술이자 사회적 예술임을 밝히는 데 핵심인 플레이, 즉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를 집중해서 다룬다. ‘분투형’ 플레이란, 간단히 말해서 게임을 하는 진짜 목적이 승리가 아닌 게임을 하는 과정 자체에 있는 플레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마피아 게임을 할 때 우리의 진짜 목적은 여럿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게임이 즐겁기 위해서는, 승리라는 일시적 목표를 진심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트위스터」 게임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모두가 균형을 잃고 와르르 무너지는 ‘실패’에 있지만, 그 원하는 실패의 경험을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전력으로 ‘성공’을 추구해야 한다.
게임이 예술이라 주장하는 그동안의 논의는 주로 다른 종류의 예술이 줄 수 있는 미적, 예술적 가치를 게임도 줄 수 있음을 입증하는 데 주력해 왔다. 저자의 접근법은 다르다. 게임은 여러 측면에서 전통적인 예술 작품과 같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이 줄 수 없는 독자적인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예술이라 주장한다. 가령 음악이 ‘소리’를 매체로 삼는 예술이라면 게임은 우리의 ‘행위성’을 매체로 삼는 예술이며, 게임 디자이너는 이를 이용해 일시적인 실천적 행위성과 실천적 환경을 창조해 내는 예술가다. 우리는 게임을 통해 게임 디자이너가 게임에 기입해 둔 행위성을 몸에 걸치고 그에 적절한 행위성과 자율성을 계발해 나갈 수 있다. 예컨대 「테트리스」를 플레이하며 여행에 알맞게 재빨리 짐을 싸는 행위성을 익힐 수도 있고, 질문과 답을 통해 누가 스파이인지 알아내야 하는 「스파이폴」을 통해서는 헛소리와 진실을 분간해 내는 행위성을 습득할 수도 있다.
나아가 저자는 이러한 게임의 행위적 조종 능력이 가져오는 사회적・ 도덕적 결과에 주목하며, 행위성을 매체로 삼는다는 사실 자체가 게임에 부여하는 엄청난 약속과 위협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보기에 사회적으로 문제 삼는 게임의 폭력적, 성적 재현의 문제는 협소한 사항이다. 중대한 위협은 게임이 약속하는 가치의 단순화와 도덕적 명료성이 현실 세계로 옮겨올 때 생긴다. 우리는 이미 일상을 게임화하고 인생 목표를 도구화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건강 관련 앱들은 하루 걸음 수를 수치화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보상과 경쟁 체계를 제공한다. 우버는 더 많은 거리를 운전한 드라이버에게 배지를 제공하며 디즈니는 접객 노동을 게임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명시적인 게임화 체계는 이미 아마존 같은 기업은 물론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에 도입되어 왔다. 하다 못해 학자들의 학술 활동에 따라붙는 논문 인용 수와 영향력 지수는, 아무래도 게임 점수처럼 보인다. 저자는 이러한 모든 특성들이 게임 속 행위적 유동성에서는 결정적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도덕적, 사회적 재앙을 불러올 수 있으며,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야말로 삶을 게임처럼 만드는 도덕적 명료성의 환상에 맞설 방책이라 말한다.
그래서 과연, 게임은 그저 시간을 낭비하는 짓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예술일까. 저술가이자 번역가 가트야 베렌스가 말했듯, “행위성에 대한 응우옌의 생각이 맞는지 보려면, 아마 게임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기려고 애쓰는 대신, 이 책에서 배운 대로 분투를 즐기면서 말이다. 이 책을 길잡이 삼아 여러분도 동참하길 바란다.”
목차
1장 행위성이라는 예술
1부 게임과 행위성
2장 분투형 플레이의 가능성
3장 행위성의 층위들
4장 게임과 자율성
2부 행위성과 예술
5장 행위성의 미학
6장 틀에 짜인 행위성
7장 게임에서의 거리
3부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변화
8장 사회적 변화로서 게임
9장 게임화와 가치 포획
10장 분투의 가치
감사의 말
역자 후기
참고 문헌
찾아보기
책 속으로
회화가 시각을, 음악이 소리를, 이야기가 서사를 기록하게 해 준다면, 게임은 행위성을 기록한다. 이는 우리가 성장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치 소설이 살아 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해 주듯, 게임은 혼자서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여러 행위성 형식을 경험하게 해 준다. 다만 그렇게 형성된 행위성 경험들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마치 예술처럼 말이다.
게임의 규칙이 무언가를 추구하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령 어떤 보드게임은 같은 색의 토큰을 모으는 데 관심을 쏟으라고 지시한다. 어떤 비디오게임은 조그만 버섯 인간들 위로 뛰어올라 짓밟는 일에 관심을 쏟으라고 지시한다. 어떤 스포츠는 공을 그물에 넣으라고 지시한다. 우리는 플레이에 몰입하게 되는 그 귀중한 상태에 이르고자 이러한 목표가 잠시 의식을 사로잡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받아들일 목표와 능력을 게임 디자이너가 특정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게임을 독자적인 예술 형식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먹고살라고 시키니, 우리는 직업을 찾고 그걸 즐기는 척해야만 한다. 세상이 우리에게 애정을 나눌 파트너를 찾으라고 시키니, 우리는 재치를 갖추는 방법을, 아니면 적어도 그럴싸한 온라인 데이트 프로필을 작성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세상은 만약 철학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면 아무리 지겹더라도 끝없는 학생들의 과제를 채점하라고 시킨다. 그러니 우리는 고개를 처박고 일하며 견뎌 나간다. 반면 게임에서는, 우리가 참여하고자 하는 바로 그 종류의 실천적 활동을 스스로 조형한다.
게임에서 가치들은 명료하고, 또렷이 제시되며, 모든 행위자에게 균일하게 부여된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한 도덕적 위험을 야기하기도 한다. 폭력적인 그래픽을 가진 게임만이 아니라 모든 게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치란 명료하고, 또렷이 드러나며, 어떤 상황에서든 균일해야 한다는 잘못된 기대를 거꾸로 현실에 끌어올 위험이다. 즉 게임은 도덕적 명료성이라는 환상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게임 플레이가 특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반대항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대상을 향한 직접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미적인 분투형 플레이어의 경우, 설령 게임 내 목표들에 대해 그때그때 커다란 헌신을 보일 수 있다고 해도, 그러한 게임 내 목표들에 대해 전반적으로는 무심해야 한다.(그래서 우리가 “내 마음 가지고 장난치지 마”[Don’t play games with my heart]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화를 경험하려면 그것을 정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뒤에서 보거나 냄새 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회화 작품은 정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규칙은 회화란 ‘무엇인지’에 관해 중요한 점을 나타낸다. 즉, 그것이 그저 캔버스 위의 물감이라는 물질적 사물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규칙이 공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실천 속에 공통적으로 준수된다는 사실은 특정한 공동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게임 또한 이러한 종류의 작품으로서, 한 발은 재료에, 또 한 발은 사회적 실천에 걸쳐 놓고 있는 셈이다.
예술 제도론은 기본적으로 ‘예술’이란 예술계라는 사회 역사적 제도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가 ‘예술’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관한 사회 언어학적 진실에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에 기댄다고 해서 정말 중요한 질문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비디오게임이 예술이냐고 무언가 다급하게 물어올 때, 그들이 특정한 사회적 제도가 실제로 게임을 받아들였는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임은 대안적인 사회적 배치와 대안적인 정치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게임은 우리로 하여금 디자인된 사회적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게임이야말로 사회적 예술의 원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멀티플레이어 게임, 보드게임, 파티 게임 등을 포함하여 매우 다양한 게임을 넓게 살펴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만일 내가 하루 휴가를 내고 아들을 동물원에 데리고 갈 경우 내 아이가 느낄 행복의 가치와 그 하루를 연구에 쓸 경우의 가치를 대체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또 대체 어떻게 내가 이것들을 이민자들의 부당한 구금에 대한 항의 시위에 참여하는 것의 중요성과 비교하겠는가? 내가 가족, 철학, 다양한 정치적 의제들에 부여하는 가치는 모두 비교하기 극히 어렵다. 게임에서는 복수의 가치를 통약함에 있어 그러한 어려움이 거의 없다. 많은 게임의 경우 목표는 단 하나이다.
게임의 윤리적 중요성과 사회적 위험에 관한 논의들은 주로 게임이 폭력적, 성적 콘텐츠를 담고 있는지에 집중해 왔다. 나는 그보다 게임 및 게임 같은 체계가 단순화·수량화된 목표의 무반성적인 추구의 확산을 부추긴다는 점을 훨씬 더 우려한다. 나는 게임이 연쇄살인범보다 월스트리트의 투기꾼을 양성하리라는 점을 더 우려한다.
작가 소개
C. 티 응우옌
유타 대학교 철학과 부교수.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회 구조와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합리성과 행위성을 형성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는 그의 글은 게임을 비롯하여 전문 지식, 집단 행위자, 커뮤니티 예술, 문화 전용, 미적 가치, 에코체임버, 매체 선정성, 신뢰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한때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음식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