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치앙마이는 어떤가요
얼마만의 여행인가. 여행에 굶주린 당신에게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영민’은 ‘치앙마이’를 권한다. 이유는, 딱히 없다. 좋으니까,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니까.
영민에게 치앙마이는 밝고 부드러운 레몬 빛으로, 나무들의 진한 초록으로,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의 빨강으로, 수영장의 청량한 파랑으로, 스님의 선명한 주황색 옷으로 다가온다. 무질서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더없이 예쁜’ 이곳에서 영민은 ‘5분 여행’을 권한다. 여행하다 보면 소소하게 뜨기 마련인 5분, 영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눈앞에 있는 것을 집중해서 바라보면 발밑에 숨어 있는 하얀 꽃이 보이고, 길을 지나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거라고 말한다.
영민의 취미는 여행하며 무언가를 ‘줍는’ 것이다. “그거 왜 주웠어?”라고 묻는다면 “그냥 거기에 있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쓸데없고 이상한 취미.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며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고, 무언가를 드로잉하고, 수집한 것을 콜라주하며 여행지마다 작은 책을 만들어왔다. 그 ‘쓸데없는’ 짓이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와 『당신의 치앙마이는 어떤가요』로 이어졌다. 일러스트레이터 영민의 여행법이다.
목차
프롤로그 8
항동(Hang Dong) 12
출발 / 호시하나 빌리지 / 태국어 공부 / 그랜드 캐니언 / 치앙마이식 사우나 / 눈으로 즐기는 수영장 / 들판 위의 피아노 / 인생 립 스테이크 / 고양이 손님 / 산책 방해자들 / 왓 우몽 동굴 사원 / 예술가들의 작업실 / 아주 작은 빵집
올드 타운(Old Town) 74
타패 게이트와 생선구이 / 목적지를 향하는 몇 가지 방법 / 치앙마이의 색 / 여름 나라 원피스와 코끼리 바지 / 태국 음식 먹으러 왔는데요? / 팟타이 중독자 / 시장에서 먹는 아침 / 너와 나의 카페 사랑 / 딱 5분만 귀를 기울이면 / 거대한 초록 / 우리의 정신을 빼놓았던 가게들 / 코코넛을 좋아하나요? / 여행하며 일하는 사람들 / 아침의 행복 / 우연한 만남 / 재즈 앤 칵테일 나이트 / 인생 마사지를 찾아서 / 치앙마이 쇼핑의 함정 /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 / 아직 끝나지 않은 밤의 마켓 / 지도를 보지 않는 자유로운 밤
산티탐(Santitham) 170
여행 메이트 / 오렌지 배드민턴 클럽 (고양이와 친해지는 법) /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아 / 이상한 슈퍼들, 문방구 탐방 / 야식은 역시 치킨이지 / 빈티지의 매력 / 타투 앤 패션 푸르트 / 요가 수업은 듣지 못했지만 / 요리 수업도 듣지 못했지만 / 여전히 줍고 다니는 중 / 천천히 흐르는
매림(Mae Rim) 214
뜬금없는 동네의 에어비앤비 / 식물원이 있는 오후 / 시내 가기 싫은 날 / 숲속의 빵 마켓과 현지인의 비밀 장소 / 새벽 한 시, 그림을 그리기 좋은 시간 / 작은 낙원, 라야 헤리티지 / 다정한 새해 인사 / 용감한 치앙마이의 안내자 / 논 뷰 킨포크 / 눈부신 꿈의 풍경 /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 언젠가 또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에필로그 269
책 속으로
2층 침실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서 나무 창문을 열며 치앙마이의 풍경을 처음 만났다. 신선한 공기,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 흐드러지다 바닥에 떨어져버린 빨간 꽃들 위로 쏟아지는 햇빛. 나뭇잎이 서로 부딪치며 흔들리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가득 울렸다. 내가 드디어 치앙마이에 왔구나, 하고 조용히 감동했다. 모두 다르게 생긴 코티지들 간의 거리는 아주 멀어서 마치 작은 숲속 마을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천천히 걸어서 수영장 옆에 위치한 식당에 태국식 조식을 먹으러 갔다. 완벽한 아침 시간이었다. 두 번째 여행의 시작 역시 호시하나 빌리지였다. 첫 번째 여행과는 다르게 혼자였기에 1인용 객실인 라임 코티지를 예약했다. 작고 아늑한 방에 누워서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나뭇잎과 새, 그리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내가 다시 치앙마이에 왔구나.
시골에 위치한 1평짜리 빵집의 사진. 너무 작고 귀여워 장난감 같아 보이는 가게의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반캉왓에서 구글 맵 주소를 찍으니 ‘걸어서 한 시간’이 뜬다.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길은 시골길 그 자체였다. 닭과 병아리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처음 보는 신기한 식물들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다. 알록달록 신기하고 이상한 가게들을 들여다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생소한 물건을 팔고 있다. 먼 길을 걷는 동안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드디어 빵집에 도착했다. 양팔을 쫙 펼치면 오른쪽 창과 왼쪽 창 모두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작디작은 공간은, 가게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작은 다락방에 들어온 기분이 들게 했다. 에그타르트와 아이스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다소 평범한 맛이지만 한 시간을 걸어온 자에게 무엇이 맛이 없으리. 그 작은 가게에서 머문 시간은 15분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시간을 걸어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고, 신기하게도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발견한다. 오면서 봤던 닭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바닥을 쪼고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에게 그 빵집은 그저 사진 속 반 평짜리 가게가 아니라 오래 걸었던 시골길까지 포함한 넓은 공간으로 기억된다. 가끔은 목적지에 가기 위한 여정이 목적지 그 자체보다 의미를 가지기도 하니까.
이른 아침, 숙소 근처의 시장으로 향했다. 의외로 크지 않은 소박한 시장에서 나는 금세 과일이 쌓여 있는 가게를 발견했다. 가게 바로 앞까지 도착해서 깨달았다. 이곳은 지인이 말했던 바로 그 가게였다. 조금은 유치한 알록달록한 무늬의 테이블보를 쓰는 곳이 또 있을 리 없었다. 단박에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세상에! 요구르트를 주문하자 주인은 아이스박스에서 과일들을 꺼내 큼직큼직하게 썰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요리지만 태국의 신선한 과일들과 꿀이 듬뿍 들어가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만족스럽게 그릇을 비우고 지인에게 요구르트 사진을 보내며 “여기 왔어요!”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자기가 테이블 구석에 아주 작은 스마일 스티커를 붙여두었는데 혹시 보았냐고 묻는다. 이미 시장을 빠져나와 스티커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붙어 있을 것이다. 나도 ‘참 맛있었어요’ 칭찬 스티커를 마음속으로 붙였다.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타이머를 맞춰놓는다. 딱 5분만 눈앞의 모든 것을 집중해서 관찰하고 인상적인 장면을 기록해본다. 당연히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완벽한 그림을 그리거나 잘 짜인 글을 쓸 수 없다. 오감을 열고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인상적인 형태를 드로잉을 해보고 들려오는 소리를 적어본다. 시작하기 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들리고 보이는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발밑에 하얀 꽃이 숨어 있었던 것, 어린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왁자지껄하게 웃고 있었던 것, 저 멀리 흙먼지 속에 작게 보이는 풍경들이 무척 아름답다는 것…….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놓칠 뻔했던 풍경을 그제야 본다. 도시의 외침이 아닌 낮은 속삭임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멈추었을 때 비로소 자신을 보여주는 것들을.
오늘치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른손에는 야식으로 먹을 요량으로 노점에서 산 팟타이와 맥주가 들려 있다. 딱히 지도를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고, 다리를 건넌다. 그다음엔 직진을 하고. 더 이상 지도를 보지 않아도 되는 순간. 내가 여행에서 좋아하는 순간들 중 하나다. 한국에서 수백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약간의 지겨움이나 익숙함과는 다르다. 아직은 완벽히 익숙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숙소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행여 숙소를 잘못 찾아갈까봐 지도를 수시로 체크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이제는 어두워진 밤에도 지도를 보지 않고 숙소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밤이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저 어둠 속에, 낮에 보았던 사랑스러운 풍경이 있다는 걸 아니까. 뜨거움이 살짝 가라앉은 여름밤의 공기, 간간이 들리는 이국적인 소음들, 아직은 어색하지만 조금은 익숙해진 조용한 길을 타박타박 걷다보면 어쩐지 자유로워진 기분이 든다.
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화방이나 문구점을 들러, 그 나라의 문구류를 구입하는 것을 좋아한다. 치앙마이에서도 문구점 탐방은 놓칠 수 없었다. 지인이 알려준 3층짜리 대형 문구점은 문구 덕후에게는 보물 창고였다. 층을 오가며 몇 년째 팔리지 않았는지 빛바래고 먼지 쌓인 물건까지 다 뒤졌다. 스탬프부터 편지지, 스테이플러 심, 노트, 스티커, 파일까지. 내가 읽지 못하는 태국어는 마치 그저 추상적이고 시각적인 장식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만 나가자는 동생의 눈초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훨씬 더 오래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여기서 사온 색색의 스테이플러 심과 낡은 크라프트 봉투는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여행 중에 나의 시선은 바닥으로 자주 향한다. 나의 취미 중 하나는 여행하며 무언가를 ‘줍는’ 것이다. 참 쓸데없고 이상한 취미다. “그거 왜 주웠어?”라고 묻는다면 “그냥 그것이 거기에 있어서”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객관적으로 쓸모없지만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것들을 여기저기서 줍고 챙긴다. 지갑, 가방 속에 넣고, 노트에 붙이고, 여행 중에 읽으려 들고 간 책 사이에 공짜 보물들을 끼워 넣는다. 서로 연결되지 않는 여행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다. 노트를 꾸미기도 하고, 책을 만들기도 한다. 이상한 퍼즐 조각들로
이번 여행의 인상을 재현한다. 그렇게 여행지마다 작은 책을 만들었다. 쓸데없는 짓도 일관성 있게 하면 의미가 생긴다. 아무튼 이 취미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내가 무엇을 줍게 될지는 미리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퍼즐 조각이 어떻게 완성이 될지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만 알 수 있다.
매림은 치앙마이 도심에서 북쪽으로 30분가량 떨어진 지역으로 대부분이 산과 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머물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에어비앤비에서 치앙마이를 검색하고 가장 예쁜 에어비앤비를 골랐는데 그게 매림에 있었다. 목조 주택을 가득 채운 빈티지 가구, 사랑스러운 주방과 멋진 정원이 있는 숙소라면 시내와 조금 멀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 정도로 시내에서 멀 줄은 몰랐고 이 정도로 시골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치앙마이의 지리에 대해 아는 것이 진정으로 없었기에 잡을 수 있는 위치의 숙소였다. (서울 도심 관광을 할 예정인데 경기도에 숙소를 잡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일단 매림과 도심을 오가는 노란색 썽태우 버스의 수가 하루에 몇 대 되지 않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버스는 늘 만석이었는데 태국인들은 능숙하게 버스 밖에 달린 봉을 잡고 매달렸다. 매림 시장이 있는 곳에서 내리면 숙소까지 30분 정도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관광객이 흥미를 가질 만한 곳은 하나도 없음은 물론이고 시장을 지나고 나면 변변찮은 가게도 없었다. 거대하게 펼쳐진 논밭 사이의 부실해 보이는 다리를 몇 번이나 건넌다. 외국인의 냄새에 반응하는 강아지들의 격한 환영과 닭들의 진로 방해는 덤이다. 매일 시내로 나가고 숙소로 돌아오는 것 자체가 긴 여정이었기에 자연히 하루의 일정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깊숙한 매림에 숙소를 잡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치앙마이에 기대했던 점을 진정으로 채워주었던 곳이 바로 매림이었으니까. 매림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치앙마이스러운 지역이며, 가장 매력적인 지역이니까.
늦은 밤. 노트와 필기구, 가위와 풀 등을 꺼낸다. 오늘 찍었던 사진을 보면서 무얼 그려볼까 고민한다. 마침내 무언가를 드로잉하기 시작하고 수집한 것들로 간단한 콜라주도 해본다. 내가 아무리 그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지만, 처음부터 잘 그려지지는 않는다. 노트에 만족스럽지 못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나 피곤함 따위를 무시하고 꿋꿋이 그리다보면 갑자기 재미있어지는 순간,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30분 이상 뛰었을 때 밀려오는 행복감을 뜻하는데, 힘든 지점을 넘어서면 몸이 가벼워지고 피로가 사라지면서 계속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한다. 그림 그리기에도 ‘러너스 하이’와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너무 재밌어서 멈추기 싫고, 밤을 새워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은 계속해서 그린다. 오늘의 기억이 선으로 면으로 드로잉북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림 그리기는 새벽까지 이어진다.
작가 소개
영민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일상과 여행에서 만난 장면들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보고 느낀 것들을 그려 작은 물건들과 책으로 담아내고 있다.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를 썼다. instagram @yyyoung_min











당신의 치앙마이는 어떤가요
얼마만의 여행인가. 여행에 굶주린 당신에게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영민’은 ‘치앙마이’를 권한다. 이유는, 딱히 없다. 좋으니까,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니까.
영민에게 치앙마이는 밝고 부드러운 레몬 빛으로, 나무들의 진한 초록으로,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의 빨강으로, 수영장의 청량한 파랑으로, 스님의 선명한 주황색 옷으로 다가온다. 무질서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더없이 예쁜’ 이곳에서 영민은 ‘5분 여행’을 권한다. 여행하다 보면 소소하게 뜨기 마련인 5분, 영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눈앞에 있는 것을 집중해서 바라보면 발밑에 숨어 있는 하얀 꽃이 보이고, 길을 지나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거라고 말한다.
영민의 취미는 여행하며 무언가를 ‘줍는’ 것이다. “그거 왜 주웠어?”라고 묻는다면 “그냥 거기에 있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쓸데없고 이상한 취미.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며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고, 무언가를 드로잉하고, 수집한 것을 콜라주하며 여행지마다 작은 책을 만들어왔다. 그 ‘쓸데없는’ 짓이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와 『당신의 치앙마이는 어떤가요』로 이어졌다. 일러스트레이터 영민의 여행법이다.
목차
프롤로그 8
항동(Hang Dong) 12
출발 / 호시하나 빌리지 / 태국어 공부 / 그랜드 캐니언 / 치앙마이식 사우나 / 눈으로 즐기는 수영장 / 들판 위의 피아노 / 인생 립 스테이크 / 고양이 손님 / 산책 방해자들 / 왓 우몽 동굴 사원 / 예술가들의 작업실 / 아주 작은 빵집
올드 타운(Old Town) 74
타패 게이트와 생선구이 / 목적지를 향하는 몇 가지 방법 / 치앙마이의 색 / 여름 나라 원피스와 코끼리 바지 / 태국 음식 먹으러 왔는데요? / 팟타이 중독자 / 시장에서 먹는 아침 / 너와 나의 카페 사랑 / 딱 5분만 귀를 기울이면 / 거대한 초록 / 우리의 정신을 빼놓았던 가게들 / 코코넛을 좋아하나요? / 여행하며 일하는 사람들 / 아침의 행복 / 우연한 만남 / 재즈 앤 칵테일 나이트 / 인생 마사지를 찾아서 / 치앙마이 쇼핑의 함정 /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 / 아직 끝나지 않은 밤의 마켓 / 지도를 보지 않는 자유로운 밤
산티탐(Santitham) 170
여행 메이트 / 오렌지 배드민턴 클럽 (고양이와 친해지는 법) /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아 / 이상한 슈퍼들, 문방구 탐방 / 야식은 역시 치킨이지 / 빈티지의 매력 / 타투 앤 패션 푸르트 / 요가 수업은 듣지 못했지만 / 요리 수업도 듣지 못했지만 / 여전히 줍고 다니는 중 / 천천히 흐르는
매림(Mae Rim) 214
뜬금없는 동네의 에어비앤비 / 식물원이 있는 오후 / 시내 가기 싫은 날 / 숲속의 빵 마켓과 현지인의 비밀 장소 / 새벽 한 시, 그림을 그리기 좋은 시간 / 작은 낙원, 라야 헤리티지 / 다정한 새해 인사 / 용감한 치앙마이의 안내자 / 논 뷰 킨포크 / 눈부신 꿈의 풍경 /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 언젠가 또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에필로그 269
책 속으로
2층 침실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서 나무 창문을 열며 치앙마이의 풍경을 처음 만났다. 신선한 공기,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로 가득한 정원, 흐드러지다 바닥에 떨어져버린 빨간 꽃들 위로 쏟아지는 햇빛. 나뭇잎이 서로 부딪치며 흔들리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가득 울렸다. 내가 드디어 치앙마이에 왔구나, 하고 조용히 감동했다. 모두 다르게 생긴 코티지들 간의 거리는 아주 멀어서 마치 작은 숲속 마을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천천히 걸어서 수영장 옆에 위치한 식당에 태국식 조식을 먹으러 갔다. 완벽한 아침 시간이었다. 두 번째 여행의 시작 역시 호시하나 빌리지였다. 첫 번째 여행과는 다르게 혼자였기에 1인용 객실인 라임 코티지를 예약했다. 작고 아늑한 방에 누워서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나뭇잎과 새, 그리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내가 다시 치앙마이에 왔구나.
시골에 위치한 1평짜리 빵집의 사진. 너무 작고 귀여워 장난감 같아 보이는 가게의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반캉왓에서 구글 맵 주소를 찍으니 ‘걸어서 한 시간’이 뜬다.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길은 시골길 그 자체였다. 닭과 병아리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처음 보는 신기한 식물들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다. 알록달록 신기하고 이상한 가게들을 들여다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생소한 물건을 팔고 있다. 먼 길을 걷는 동안 지루해질 틈이 없었다. 드디어 빵집에 도착했다. 양팔을 쫙 펼치면 오른쪽 창과 왼쪽 창 모두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작디작은 공간은, 가게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작은 다락방에 들어온 기분이 들게 했다. 에그타르트와 아이스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다소 평범한 맛이지만 한 시간을 걸어온 자에게 무엇이 맛이 없으리. 그 작은 가게에서 머문 시간은 15분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시간을 걸어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지고, 신기하게도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발견한다. 오면서 봤던 닭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바닥을 쪼고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에게 그 빵집은 그저 사진 속 반 평짜리 가게가 아니라 오래 걸었던 시골길까지 포함한 넓은 공간으로 기억된다. 가끔은 목적지에 가기 위한 여정이 목적지 그 자체보다 의미를 가지기도 하니까.
이른 아침, 숙소 근처의 시장으로 향했다. 의외로 크지 않은 소박한 시장에서 나는 금세 과일이 쌓여 있는 가게를 발견했다. 가게 바로 앞까지 도착해서 깨달았다. 이곳은 지인이 말했던 바로 그 가게였다. 조금은 유치한 알록달록한 무늬의 테이블보를 쓰는 곳이 또 있을 리 없었다. 단박에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세상에! 요구르트를 주문하자 주인은 아이스박스에서 과일들을 꺼내 큼직큼직하게 썰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요리지만 태국의 신선한 과일들과 꿀이 듬뿍 들어가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만족스럽게 그릇을 비우고 지인에게 요구르트 사진을 보내며 “여기 왔어요!”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자기가 테이블 구석에 아주 작은 스마일 스티커를 붙여두었는데 혹시 보았냐고 묻는다. 이미 시장을 빠져나와 스티커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붙어 있을 것이다. 나도 ‘참 맛있었어요’ 칭찬 스티커를 마음속으로 붙였다.
핸드폰을 잠시 내려놓고 타이머를 맞춰놓는다. 딱 5분만 눈앞의 모든 것을 집중해서 관찰하고 인상적인 장면을 기록해본다. 당연히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완벽한 그림을 그리거나 잘 짜인 글을 쓸 수 없다. 오감을 열고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인상적인 형태를 드로잉을 해보고 들려오는 소리를 적어본다. 시작하기 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들리고 보이는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발밑에 하얀 꽃이 숨어 있었던 것, 어린아이들이 지나가면서 왁자지껄하게 웃고 있었던 것, 저 멀리 흙먼지 속에 작게 보이는 풍경들이 무척 아름답다는 것…….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놓칠 뻔했던 풍경을 그제야 본다. 도시의 외침이 아닌 낮은 속삭임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멈추었을 때 비로소 자신을 보여주는 것들을.
오늘치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른손에는 야식으로 먹을 요량으로 노점에서 산 팟타이와 맥주가 들려 있다. 딱히 지도를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고, 다리를 건넌다. 그다음엔 직진을 하고. 더 이상 지도를 보지 않아도 되는 순간. 내가 여행에서 좋아하는 순간들 중 하나다. 한국에서 수백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끼는 약간의 지겨움이나 익숙함과는 다르다. 아직은 완벽히 익숙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10분 정도 더 걸으면 숙소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행여 숙소를 잘못 찾아갈까봐 지도를 수시로 체크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이제는 어두워진 밤에도 지도를 보지 않고 숙소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밤이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저 어둠 속에, 낮에 보았던 사랑스러운 풍경이 있다는 걸 아니까. 뜨거움이 살짝 가라앉은 여름밤의 공기, 간간이 들리는 이국적인 소음들, 아직은 어색하지만 조금은 익숙해진 조용한 길을 타박타박 걷다보면 어쩐지 자유로워진 기분이 든다.
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화방이나 문구점을 들러, 그 나라의 문구류를 구입하는 것을 좋아한다. 치앙마이에서도 문구점 탐방은 놓칠 수 없었다. 지인이 알려준 3층짜리 대형 문구점은 문구 덕후에게는 보물 창고였다. 층을 오가며 몇 년째 팔리지 않았는지 빛바래고 먼지 쌓인 물건까지 다 뒤졌다. 스탬프부터 편지지, 스테이플러 심, 노트, 스티커, 파일까지. 내가 읽지 못하는 태국어는 마치 그저 추상적이고 시각적인 장식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만 나가자는 동생의 눈초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훨씬 더 오래 이곳에 머물렀을 것이다. 여기서 사온 색색의 스테이플러 심과 낡은 크라프트 봉투는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여행 중에 나의 시선은 바닥으로 자주 향한다. 나의 취미 중 하나는 여행하며 무언가를 ‘줍는’ 것이다. 참 쓸데없고 이상한 취미다. “그거 왜 주웠어?”라고 묻는다면 “그냥 그것이 거기에 있어서”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객관적으로 쓸모없지만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것들을 여기저기서 줍고 챙긴다. 지갑, 가방 속에 넣고, 노트에 붙이고, 여행 중에 읽으려 들고 간 책 사이에 공짜 보물들을 끼워 넣는다. 서로 연결되지 않는 여행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다. 노트를 꾸미기도 하고, 책을 만들기도 한다. 이상한 퍼즐 조각들로
이번 여행의 인상을 재현한다. 그렇게 여행지마다 작은 책을 만들었다. 쓸데없는 짓도 일관성 있게 하면 의미가 생긴다. 아무튼 이 취미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내가 무엇을 줍게 될지는 미리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퍼즐 조각이 어떻게 완성이 될지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만 알 수 있다.
매림은 치앙마이 도심에서 북쪽으로 30분가량 떨어진 지역으로 대부분이 산과 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머물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에어비앤비에서 치앙마이를 검색하고 가장 예쁜 에어비앤비를 골랐는데 그게 매림에 있었다. 목조 주택을 가득 채운 빈티지 가구, 사랑스러운 주방과 멋진 정원이 있는 숙소라면 시내와 조금 멀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 정도로 시내에서 멀 줄은 몰랐고 이 정도로 시골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치앙마이의 지리에 대해 아는 것이 진정으로 없었기에 잡을 수 있는 위치의 숙소였다. (서울 도심 관광을 할 예정인데 경기도에 숙소를 잡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일단 매림과 도심을 오가는 노란색 썽태우 버스의 수가 하루에 몇 대 되지 않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버스는 늘 만석이었는데 태국인들은 능숙하게 버스 밖에 달린 봉을 잡고 매달렸다. 매림 시장이 있는 곳에서 내리면 숙소까지 30분 정도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관광객이 흥미를 가질 만한 곳은 하나도 없음은 물론이고 시장을 지나고 나면 변변찮은 가게도 없었다. 거대하게 펼쳐진 논밭 사이의 부실해 보이는 다리를 몇 번이나 건넌다. 외국인의 냄새에 반응하는 강아지들의 격한 환영과 닭들의 진로 방해는 덤이다. 매일 시내로 나가고 숙소로 돌아오는 것 자체가 긴 여정이었기에 자연히 하루의 일정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깊숙한 매림에 숙소를 잡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치앙마이에 기대했던 점을 진정으로 채워주었던 곳이 바로 매림이었으니까. 매림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치앙마이스러운 지역이며, 가장 매력적인 지역이니까.
늦은 밤. 노트와 필기구, 가위와 풀 등을 꺼낸다. 오늘 찍었던 사진을 보면서 무얼 그려볼까 고민한다. 마침내 무언가를 드로잉하기 시작하고 수집한 것들로 간단한 콜라주도 해본다. 내가 아무리 그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지만, 처음부터 잘 그려지지는 않는다. 노트에 만족스럽지 못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나 피곤함 따위를 무시하고 꿋꿋이 그리다보면 갑자기 재미있어지는 순간,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30분 이상 뛰었을 때 밀려오는 행복감을 뜻하는데, 힘든 지점을 넘어서면 몸이 가벼워지고 피로가 사라지면서 계속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한다. 그림 그리기에도 ‘러너스 하이’와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너무 재밌어서 멈추기 싫고, 밤을 새워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은 계속해서 그린다. 오늘의 기억이 선으로 면으로 드로잉북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그림 그리기는 새벽까지 이어진다.
작가 소개
영민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일상과 여행에서 만난 장면들과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보고 느낀 것들을 그려 작은 물건들과 책으로 담아내고 있다.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를 썼다. instagram @yyyoung_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