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불효자랑
“살기 위해 우리는 불효를 선택했다.”
우리는 모두 강제로 삶을 부여받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세상은 온통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도대체 왜? 태어난 것도 내 의지가 아닌데, 효도까지 필수로 해야 한다고?
‘그래도 가족이니까’라는 최면과 ‘이만하면 괜찮아’라는 합리화에서 벗어나, 용기 있게 불효를 선택한 작가 열세 명이 한 책에 모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불효꾼’이라 부르며 작은 축제를 연다. 착취, 폭력, 도청, 방임, 차별 등으로 가정이 곧 가시밭 같았던 우리는 이 축제에서 기지개를 켜고 자신의 목격과 경험을 부르짖는다.
각자의 진실을 축제처럼 펼쳐놓은 채, 이제 우리는 당신을 기다린다. 효도라는 관습에 몸과 마음이 묶여 원치 않는 용서를 거듭해 온 당신을, 가족 인생 말고 ‘내 인생’만 챙겨도 된다는 말을 기다려온 당신을, 살기 위해 불효를 선택한 타인의 이야기를 기다려온 당신을, 한줌의 불꽃이 필요한 당신을, 전국불효자랑에 초대한다.
목차
친절한 소설가 계피 씨의 불효
나를 놓은 엄마에게
패밀리 어페어
죽어서도 외로우소서
열무 꽃 필 무렵
명복
그래서 나는 당신을 모르고 싶어요
반려 게이 탈출기
딸이라는 불치병
여자를 사랑한 딸이 있었네
엄마 뒷담화 대장정
효가 아니면 또 어떤가
불효가 약이다
책 속으로
세상이 강요하는 효도를 거부하면 늘 불효녀와 불효자 등 지긋지긋한 성별 이분법으로 호명당했습니다. 이 단어를 우리는 ‘불효꾼’으로 바꿔 부르려 합니다. 세간의 말에 자꾸만 미끄러지던 불효꾼들이 작은 축제를 엽니다. 착취, 폭력, 도청, 방임, 차별 등으로 가정이 곧 가시밭 같았던 우리는 이 축제에서 기지개를 켜고 자신의 목격과 경험을 부르짖습니다. 이곳은 온통 시끄럽고 뜨겁습니다. 이 사람들의 가족과 가정은 당신의 것과 매우 흡사할 것입니다. 또는 매우 다를 수도 있고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두가 각자의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_「기획자의 말」 중에서
부모님을 형사고발하고 민사고소하였습니다. 부와 모, 둘 다 고소했습니다. 이유요? 간단합니다. 부모님이 올바른 인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_「친절한 소설가 계피 씨의 불효」 중에서
엄마를 안아주면서 나는 동시에 스스로를 안아주었어. 당신의 모든 손찌검을 묵묵히 받아내던 세 살, 여덟 살, 열세 살, 열아홉 살의 나까지 함께 끌어안았어. 그 어린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속으로 조용히 말을 건넸어. 우리는 살아남았어. 살아남아서 우리를 수차례 죽이려고 했던 이 사람을 완벽히 용서하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안아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어. _「나를 놓은 엄마에게」 중에서
엄마를 때리려는 시늉을 하기에 식칼 손잡이를 잡았나? 그걸 보고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던가? 아니, 나를 때리려 들었던가? 그래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폭력을 맞이할 준비를 했던가? 그때 내가 쥐고 있던 게 휴대전화였나 주먹이었나? 기억을 정리하는 일에 끊임없이 실패한다.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며 자신하다가도 하룻밤 지나면 다시 기억을 재조립해야만 한다. 그에게 욕을 뱉는 동안 나는 산산조각 났다. _「패밀리 어페어」 중에서
친부는 그렇게 무연고, 시신을 거둬줄 사람 없는 채로 공영 장례식장에 건너갔다. 죽을 때도, 죽어서도, 앞으로 영원히 당신은 외로워야 한다. 외롭고 처절하게 울부짖다가 저승의 시간마저 무기력하게 보내길 바란다. 나는 다짐한다. 당신을 추모하지 않고 당신의 죽음을 영원히 비웃겠다. _「죽어서도 외로우소서」 중에서
인생 첫 기억을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일단 다섯 살이었던 것 같고 추석인지 설날인지 아빠 제삿날 중 하나였을 거다. 어른들은 전을 부치고 있고 그 옆에서 사촌들과 음식들을 집어 먹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어떤 ‘아줌마’가 들어왔다. 내가 모르는 친척인가? 생전 처음 보는 긴 생머리의 아줌마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열무야 엄마야.” _「열무 꽃 필 무렵」 중에서
죽어야 끝난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난다. 세상에는 그런 관계가 있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때로 그것은 가족 간의 것이다. 아직 아무도 안 죽었다. 욕 한마디 나오기에 딱 좋은 타이밍인데 이번에도 참는다. 나는 그런 인간으로 자랐다. 그 정도로밖에 못 자랐다. ‘아빠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 그걸 정말 쓰고 싶다. _「명복」 중에서
애초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엄마를 팔아먹는다는 것 자체가 불효지. 아니 그 전에 난 너무 큰 불효를 했어. 자살 시도라는 불효. 너무 피곤해. 엄마의 입장을 생각하려는 게. 엄마를 이해하려는 게. 엄마를 한 인간, 한 여자로 여기려는 게. 어려워.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엄마를 알 수 있겠어. 평생이루지 못할 일을 할 바에 이기적으로 굴겠어. _「그래서 나는 당신을 모르고 싶어요」 중에서
퀴어는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는다고 들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 것이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적어도 나의 세계에선 현실인 걸. 정말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가 스스로를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여기고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반발심이 들기도 한다. 내가 뭐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고, 나를 낳은 건 당신이지 않냐고, 나는 당신이 낳은 대로 태어났을 뿐이라고. 한참을 그렇게 중얼거려봐도 남는 건 내가 게이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_「반려 게이 탈출기」 중에서
오빠의 주먹질은 한 번의 실수로 그치지 않았다. 그 장면을 다시금 마주했던 순간, 나는 조용히 112를 눌렀다. 집 안에 들이닥친 경찰들을 바라보던 엄마의 시선은 한순간 부풀었다가, 내게로 옮겨와 살기 어린 칼날이 되었다. 미쳤냐고. 오빠를 전과자로 만들 셈이냐면서. 폭행 가해자에게 닿았어야 마땅한 비난들은 모두 내게 날아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 곁으로 경찰들이 다가왔고, 엄마는 그들과 내 사이를 비집고 섰다. 아무 일 없었다니까 그러네! _「딸이라는 불치병」 중에서
집 밖의 집은 평화로웠다. 때로 걸려오는 전화는 순간순간 날 흔들어 놓았지만 점점 나의 뿌리를 옮겨갔다. S와 함께 사는 고양이 덕분에 매일 알레르기 약을 먹어야 했지만 그 어떤 방해물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린 청사진에서 멀어질수록 평온해졌다. 그리고 당연히 이 사실을 엄마는 알아차렸다. 하지만 나에게 묻지 않았다. 알면서도 외면하는, 그 불편한 거리감. 그 거리감이 처음에는 내가 따낸 메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_「여자를 사랑한 딸이 있었네」 중에서
엄마가 내 딸을 예뻐할 때마다 속이 뒤틀린다. 딸들한테 치대는 것도 모자라 손녀에게까지 사랑과 관심을 갈구할 때면 신경질이 난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닌, 아이에게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 밉살스럽다. 손녀를 데려가서 종일 웃게 해주고, 옷장을 나르고 낡은 옷을 버려주고, 온갖 쓸데없는 동네 사람들 뒷담화를 들어주어도 나는 엄마를 활짝 웃게 할 수 없다. 엄마 마음에는 언제까지고 남동생 모양으로 구멍이 나 있고 그 커다란 구멍을 채우기에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딸이니까. _「엄마 뒷담화 대장정」 중에서
엄마가 원하는 딸 노릇, 고모 노릇을 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 과연 맞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바란다고 퇴사를 안 하고 다니기 싫은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는 일이 효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발견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효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삶이 효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뭐 어떤가. _「효가 아니면 어떤가」 중에서
글을 쓰고 동생에게 한번 읽어달라고 했더니 눈물 흘리는 사진을 보내왔다. 우는 동생을 웃으며 놀렸다. 불효꾼은 웃고 있는데 네가 왜 우냐며. 세상의 모든 불효꾼들이 울지 말고, 웃었으면 좋겠다. _「불효가 약이다」 중에서
작가 소개
김계피
소설을 씁니다. 「행운의 소설」, 「슈퍼스타 퍼니캣」 등을 발표했고 「불안한 밤의 소네트」로 대산문학상 본선에 올랐음에도 호명 받지 못하고 있어 소설들에게 늘 미안해하는 타입의 작가. 저는 사람보다 작품이 기억에 남기를 바라 첫 책을 큰 출판사에서 내는 것이 꿈입니다만 세상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우울한 날에는 고양이를 쓰다듬고 휘도와 이야기하며 식물에 물을 줍니다.
연옥
에세이 작가, 1인 출판사 ‘제로페이퍼’ 대표, 모임 기획자, 번역가입니다. 에세이집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 『가족을 갖고 싶다는 착각』을 썼습니다. 가정폭력으로 얻은 우울증과 경계성 성격 장애로 인해 학교와 회사를 그만둔 경험이 있습니다. 정상 가족, 노동에 적합한 몸과 같이 사회에서 규정한 정상성에 의문을 던지고, 이로부터 비껴간 존재로서 느리지만 유연하게 살아남는 이야기를 합니다.
진서하
『상온보관의 마음』, 『돌아오는 새벽은 답이 아니다』를 썼다. 함께 쓴 책으로 『용맹하게 다정하게 눈이 부시게』가 있다. 감정의 누수와 그에 침수되는 각자의 진실에 관심 있다. TK 장녀. 경북 청도 종갓집의 차남과 대구광역시 종갓집의 차녀 사이에서 태어나 자랐다. ‘종갓집’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알 길이없다.
희석
주민등록상 이름은 ‘안희석’이지만, 태어나자마자 강제로 부여받은 부계의 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에 행정 서류가 아닌 곳에는 ‘희석’만 쓰고 있다. 신문사와 시청과 기업과 정당 등에서 글을 쓰며 생활비를 벌었고, 이제는 이 책의 발행처인 독립출판사 ‘발코니’를 운영한다. 『도망치듯 사랑을 말한다면』을 비롯한 여러 책을 썼고, 매주 금요일 아침 8시엔 이메일로 「희석된 일주일」을 발송한다.
최열무
열무란 어린 무라는 뜻이며 여린 무에서 유래됐다. 우리가 흔히 열무김치로 먹는 열무도 꽃이 핀다고 한다. 제때 수확하면 맛있는 열무비빔밥, 열무국수를 해먹을 수 있는 열무가 되고, 수확 시기를 놓치면 네 개의 꽃잎에 흰색과 엷은 보랏빛이 도는 열무 꽃이 된다. 꽃이 핀 열무는 퇴비로 쓰거나 열무 꽃에서 나온 씨앗을 수확해 파종한다. 꽃이 핀 열무도 먹을 수는 있지만 질기고 맛이 좋지 않아 대부분 먹지 않는다. 맛있는 열무비빔밥과 열무국수를 먹으려면 열무를 제때 수확해야 한다.
신유보
수원에서 나고 영국에서 자랐다. 귀국 후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다. 시 주변을 맴돌며 밥벌이로 영어를 가르친다. 이방인의 감각과 소수자 담론에 관심 있다. 에세이 『집, 어느 민달팽이의 유랑』, 『애정 재단』, 『빈집과 공명』, 시 『하지가 지나고 장마가 끝나도』 등. 독립출판사 ‘보라프레스’ 운영.
백범
엄마 아빠 옷 입고 레즈 클럽 간 불효꾼. 가끔 자다가 늦는 사람. 2001년에 대학로에서 태어나 성북구에 산다. 글을 쓰고 극장에 서성인다. 공연 기획연출을 전공했으며 글방에서 글쓰기와 합평을 연습했다. 구석의 냄새 나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정신병, 우정, 섹슈얼리티에 관한 에세이, 희곡, 소설을 쓴다. 2024년에 한과 함께 메일링 서비스 「미치도록 살아있긔」를 기획했고 2025년에 ‘마감클럽’을 운영했다.
김성호
게이이고 작가합니다. 살기 위해 쓰는 사람. 여러 독립출판물에 글을 발표했고 현재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포, 퀴어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잡식합니다. 당신에게 내 글이 읽힐 때까지 쓰겠습니다.
민정
붕괴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지독하게 고아가 되고 싶었고 고아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 이와 부부가 되었습니다. 살아온 가정은 저를 늘 불완전하게 만들었지만 선택한 가족은 스스로를 충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마음건강 매거진 「월간 마음건강」 책임 에디터로 활동하며 그 변화의 순간들을 부단히 기록하고 있어요. 수없이 찢겨 놓고도 누구보다 해맑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대충 지금의 순간을 살아가는, 가장 충만하면서도 누구보다 불완전한, 그런 글을 씁니다.
단
부산에서 S와 고양이 아리와 살고 있습니다. 예술가를 꿈꾸며 철없이 탈없이 지내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움을 걷고, 우리 행복하기로.
원효서
TK 장녀, 생활보다 취미에 집착하는 편, 읽고 쓰고 보고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백소현
나른한 책방지기. 만만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주리
30여 년의 효녀 생활을 그만둔 사람, 바이크를 타고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게 제일 행복한 사람. 대구에 사는 숲선생님.















전국불효자랑
“살기 위해 우리는 불효를 선택했다.”
우리는 모두 강제로 삶을 부여받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세상은 온통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도대체 왜? 태어난 것도 내 의지가 아닌데, 효도까지 필수로 해야 한다고?
‘그래도 가족이니까’라는 최면과 ‘이만하면 괜찮아’라는 합리화에서 벗어나, 용기 있게 불효를 선택한 작가 열세 명이 한 책에 모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불효꾼’이라 부르며 작은 축제를 연다. 착취, 폭력, 도청, 방임, 차별 등으로 가정이 곧 가시밭 같았던 우리는 이 축제에서 기지개를 켜고 자신의 목격과 경험을 부르짖는다.
각자의 진실을 축제처럼 펼쳐놓은 채, 이제 우리는 당신을 기다린다. 효도라는 관습에 몸과 마음이 묶여 원치 않는 용서를 거듭해 온 당신을, 가족 인생 말고 ‘내 인생’만 챙겨도 된다는 말을 기다려온 당신을, 살기 위해 불효를 선택한 타인의 이야기를 기다려온 당신을, 한줌의 불꽃이 필요한 당신을, 전국불효자랑에 초대한다.
목차
친절한 소설가 계피 씨의 불효
나를 놓은 엄마에게
패밀리 어페어
죽어서도 외로우소서
열무 꽃 필 무렵
명복
그래서 나는 당신을 모르고 싶어요
반려 게이 탈출기
딸이라는 불치병
여자를 사랑한 딸이 있었네
엄마 뒷담화 대장정
효가 아니면 또 어떤가
불효가 약이다
책 속으로
세상이 강요하는 효도를 거부하면 늘 불효녀와 불효자 등 지긋지긋한 성별 이분법으로 호명당했습니다. 이 단어를 우리는 ‘불효꾼’으로 바꿔 부르려 합니다. 세간의 말에 자꾸만 미끄러지던 불효꾼들이 작은 축제를 엽니다. 착취, 폭력, 도청, 방임, 차별 등으로 가정이 곧 가시밭 같았던 우리는 이 축제에서 기지개를 켜고 자신의 목격과 경험을 부르짖습니다. 이곳은 온통 시끄럽고 뜨겁습니다. 이 사람들의 가족과 가정은 당신의 것과 매우 흡사할 것입니다. 또는 매우 다를 수도 있고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두가 각자의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_「기획자의 말」 중에서
부모님을 형사고발하고 민사고소하였습니다. 부와 모, 둘 다 고소했습니다. 이유요? 간단합니다. 부모님이 올바른 인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_「친절한 소설가 계피 씨의 불효」 중에서
엄마를 안아주면서 나는 동시에 스스로를 안아주었어. 당신의 모든 손찌검을 묵묵히 받아내던 세 살, 여덟 살, 열세 살, 열아홉 살의 나까지 함께 끌어안았어. 그 어린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속으로 조용히 말을 건넸어. 우리는 살아남았어. 살아남아서 우리를 수차례 죽이려고 했던 이 사람을 완벽히 용서하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안아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어. _「나를 놓은 엄마에게」 중에서
엄마를 때리려는 시늉을 하기에 식칼 손잡이를 잡았나? 그걸 보고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던가? 아니, 나를 때리려 들었던가? 그래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폭력을 맞이할 준비를 했던가? 그때 내가 쥐고 있던 게 휴대전화였나 주먹이었나? 기억을 정리하는 일에 끊임없이 실패한다.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며 자신하다가도 하룻밤 지나면 다시 기억을 재조립해야만 한다. 그에게 욕을 뱉는 동안 나는 산산조각 났다. _「패밀리 어페어」 중에서
친부는 그렇게 무연고, 시신을 거둬줄 사람 없는 채로 공영 장례식장에 건너갔다. 죽을 때도, 죽어서도, 앞으로 영원히 당신은 외로워야 한다. 외롭고 처절하게 울부짖다가 저승의 시간마저 무기력하게 보내길 바란다. 나는 다짐한다. 당신을 추모하지 않고 당신의 죽음을 영원히 비웃겠다. _「죽어서도 외로우소서」 중에서
인생 첫 기억을 누군가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일단 다섯 살이었던 것 같고 추석인지 설날인지 아빠 제삿날 중 하나였을 거다. 어른들은 전을 부치고 있고 그 옆에서 사촌들과 음식들을 집어 먹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어떤 ‘아줌마’가 들어왔다. 내가 모르는 친척인가? 생전 처음 보는 긴 생머리의 아줌마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열무야 엄마야.” _「열무 꽃 필 무렵」 중에서
죽어야 끝난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난다. 세상에는 그런 관계가 있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때로 그것은 가족 간의 것이다. 아직 아무도 안 죽었다. 욕 한마디 나오기에 딱 좋은 타이밍인데 이번에도 참는다. 나는 그런 인간으로 자랐다. 그 정도로밖에 못 자랐다. ‘아빠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 그걸 정말 쓰고 싶다. _「명복」 중에서
애초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엄마를 팔아먹는다는 것 자체가 불효지. 아니 그 전에 난 너무 큰 불효를 했어. 자살 시도라는 불효. 너무 피곤해. 엄마의 입장을 생각하려는 게. 엄마를 이해하려는 게. 엄마를 한 인간, 한 여자로 여기려는 게. 어려워.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엄마를 알 수 있겠어. 평생이루지 못할 일을 할 바에 이기적으로 굴겠어. _「그래서 나는 당신을 모르고 싶어요」 중에서
퀴어는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는다고 들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 것이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적어도 나의 세계에선 현실인 걸. 정말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가 스스로를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여기고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반발심이 들기도 한다. 내가 뭐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고, 나를 낳은 건 당신이지 않냐고, 나는 당신이 낳은 대로 태어났을 뿐이라고. 한참을 그렇게 중얼거려봐도 남는 건 내가 게이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_「반려 게이 탈출기」 중에서
오빠의 주먹질은 한 번의 실수로 그치지 않았다. 그 장면을 다시금 마주했던 순간, 나는 조용히 112를 눌렀다. 집 안에 들이닥친 경찰들을 바라보던 엄마의 시선은 한순간 부풀었다가, 내게로 옮겨와 살기 어린 칼날이 되었다. 미쳤냐고. 오빠를 전과자로 만들 셈이냐면서. 폭행 가해자에게 닿았어야 마땅한 비난들은 모두 내게 날아왔다. 어안이 벙벙해진 내 곁으로 경찰들이 다가왔고, 엄마는 그들과 내 사이를 비집고 섰다. 아무 일 없었다니까 그러네! _「딸이라는 불치병」 중에서
집 밖의 집은 평화로웠다. 때로 걸려오는 전화는 순간순간 날 흔들어 놓았지만 점점 나의 뿌리를 옮겨갔다. S와 함께 사는 고양이 덕분에 매일 알레르기 약을 먹어야 했지만 그 어떤 방해물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린 청사진에서 멀어질수록 평온해졌다. 그리고 당연히 이 사실을 엄마는 알아차렸다. 하지만 나에게 묻지 않았다. 알면서도 외면하는, 그 불편한 거리감. 그 거리감이 처음에는 내가 따낸 메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_「여자를 사랑한 딸이 있었네」 중에서
엄마가 내 딸을 예뻐할 때마다 속이 뒤틀린다. 딸들한테 치대는 것도 모자라 손녀에게까지 사랑과 관심을 갈구할 때면 신경질이 난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닌, 아이에게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 밉살스럽다. 손녀를 데려가서 종일 웃게 해주고, 옷장을 나르고 낡은 옷을 버려주고, 온갖 쓸데없는 동네 사람들 뒷담화를 들어주어도 나는 엄마를 활짝 웃게 할 수 없다. 엄마 마음에는 언제까지고 남동생 모양으로 구멍이 나 있고 그 커다란 구멍을 채우기에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딸이니까. _「엄마 뒷담화 대장정」 중에서
엄마가 원하는 딸 노릇, 고모 노릇을 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 과연 맞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바란다고 퇴사를 안 하고 다니기 싫은 회사를 꾸역꾸역 다니는 일이 효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발견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효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삶이 효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뭐 어떤가. _「효가 아니면 어떤가」 중에서
글을 쓰고 동생에게 한번 읽어달라고 했더니 눈물 흘리는 사진을 보내왔다. 우는 동생을 웃으며 놀렸다. 불효꾼은 웃고 있는데 네가 왜 우냐며. 세상의 모든 불효꾼들이 울지 말고, 웃었으면 좋겠다. _「불효가 약이다」 중에서
작가 소개
김계피
소설을 씁니다. 「행운의 소설」, 「슈퍼스타 퍼니캣」 등을 발표했고 「불안한 밤의 소네트」로 대산문학상 본선에 올랐음에도 호명 받지 못하고 있어 소설들에게 늘 미안해하는 타입의 작가. 저는 사람보다 작품이 기억에 남기를 바라 첫 책을 큰 출판사에서 내는 것이 꿈입니다만 세상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우울한 날에는 고양이를 쓰다듬고 휘도와 이야기하며 식물에 물을 줍니다.
연옥
에세이 작가, 1인 출판사 ‘제로페이퍼’ 대표, 모임 기획자, 번역가입니다. 에세이집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 『가족을 갖고 싶다는 착각』을 썼습니다. 가정폭력으로 얻은 우울증과 경계성 성격 장애로 인해 학교와 회사를 그만둔 경험이 있습니다. 정상 가족, 노동에 적합한 몸과 같이 사회에서 규정한 정상성에 의문을 던지고, 이로부터 비껴간 존재로서 느리지만 유연하게 살아남는 이야기를 합니다.
진서하
『상온보관의 마음』, 『돌아오는 새벽은 답이 아니다』를 썼다. 함께 쓴 책으로 『용맹하게 다정하게 눈이 부시게』가 있다. 감정의 누수와 그에 침수되는 각자의 진실에 관심 있다. TK 장녀. 경북 청도 종갓집의 차남과 대구광역시 종갓집의 차녀 사이에서 태어나 자랐다. ‘종갓집’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알 길이없다.
희석
주민등록상 이름은 ‘안희석’이지만, 태어나자마자 강제로 부여받은 부계의 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에 행정 서류가 아닌 곳에는 ‘희석’만 쓰고 있다. 신문사와 시청과 기업과 정당 등에서 글을 쓰며 생활비를 벌었고, 이제는 이 책의 발행처인 독립출판사 ‘발코니’를 운영한다. 『도망치듯 사랑을 말한다면』을 비롯한 여러 책을 썼고, 매주 금요일 아침 8시엔 이메일로 「희석된 일주일」을 발송한다.
최열무
열무란 어린 무라는 뜻이며 여린 무에서 유래됐다. 우리가 흔히 열무김치로 먹는 열무도 꽃이 핀다고 한다. 제때 수확하면 맛있는 열무비빔밥, 열무국수를 해먹을 수 있는 열무가 되고, 수확 시기를 놓치면 네 개의 꽃잎에 흰색과 엷은 보랏빛이 도는 열무 꽃이 된다. 꽃이 핀 열무는 퇴비로 쓰거나 열무 꽃에서 나온 씨앗을 수확해 파종한다. 꽃이 핀 열무도 먹을 수는 있지만 질기고 맛이 좋지 않아 대부분 먹지 않는다. 맛있는 열무비빔밥과 열무국수를 먹으려면 열무를 제때 수확해야 한다.
신유보
수원에서 나고 영국에서 자랐다. 귀국 후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다. 시 주변을 맴돌며 밥벌이로 영어를 가르친다. 이방인의 감각과 소수자 담론에 관심 있다. 에세이 『집, 어느 민달팽이의 유랑』, 『애정 재단』, 『빈집과 공명』, 시 『하지가 지나고 장마가 끝나도』 등. 독립출판사 ‘보라프레스’ 운영.
백범
엄마 아빠 옷 입고 레즈 클럽 간 불효꾼. 가끔 자다가 늦는 사람. 2001년에 대학로에서 태어나 성북구에 산다. 글을 쓰고 극장에 서성인다. 공연 기획연출을 전공했으며 글방에서 글쓰기와 합평을 연습했다. 구석의 냄새 나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정신병, 우정, 섹슈얼리티에 관한 에세이, 희곡, 소설을 쓴다. 2024년에 한과 함께 메일링 서비스 「미치도록 살아있긔」를 기획했고 2025년에 ‘마감클럽’을 운영했다.
김성호
게이이고 작가합니다. 살기 위해 쓰는 사람. 여러 독립출판물에 글을 발표했고 현재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포, 퀴어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잡식합니다. 당신에게 내 글이 읽힐 때까지 쓰겠습니다.
민정
붕괴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지독하게 고아가 되고 싶었고 고아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 이와 부부가 되었습니다. 살아온 가정은 저를 늘 불완전하게 만들었지만 선택한 가족은 스스로를 충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마음건강 매거진 「월간 마음건강」 책임 에디터로 활동하며 그 변화의 순간들을 부단히 기록하고 있어요. 수없이 찢겨 놓고도 누구보다 해맑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대충 지금의 순간을 살아가는, 가장 충만하면서도 누구보다 불완전한, 그런 글을 씁니다.
단
부산에서 S와 고양이 아리와 살고 있습니다. 예술가를 꿈꾸며 철없이 탈없이 지내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움을 걷고, 우리 행복하기로.
원효서
TK 장녀, 생활보다 취미에 집착하는 편, 읽고 쓰고 보고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백소현
나른한 책방지기. 만만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주리
30여 년의 효녀 생활을 그만둔 사람, 바이크를 타고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게 제일 행복한 사람. 대구에 사는 숲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