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딸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당신을 되살린 후 다시 죽이기 위해서일까요? (p.26)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당신을 향해 편지를 쓰는 것이다, 그리움도 애틋함도 없이. 당신을 되살린 후, 다시 죽이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딛고 세계를 구성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을 마주하는 작품 <다른 딸>이 출간되었다. 작가가 1984년 르노드 상을 받았던 <남자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삶을,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한 여자>에서 어머니의 인생을 기록하였다면, <다른 딸>이 천착하는 대상은 ‘당신’, 아니 에르노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죽은 언니 지네트이다.
Nil 출판사의 편지 시리즈 기획(‘Les Affranchis’)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한 <다른 딸>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편지를 써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하여 시작되는 이 편지는 아니 에르노 특유의 아름다운 칼날 같은 문체를 통해 우아한 유속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나의 흔적에 얹힌’ 당신을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으로 죽은 언니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촉발된 어린아이의 불안과 혼란, 부재와 존재의 탐구, 그리고 마침내 ‘당신’에 대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온전한 ‘나’로 향하고자 하는 여정이 모두 여기, 이 물결에 스며있다.
목차
다른 딸 - 9p
'나와 당신' (추천사) - 93p
책 속에서
이 일을 이야기로 만드는 건, 60년 전부터 벽장 안에 처박혀 있던 필름을 꺼내어 현상하듯, 흐릿해진 경험을 끄집어내어 이야기에 끝을 내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 14p
해가 지날수록 나는 이 이야기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요. 한 번도 나누지 않았던 언어들만 있을 뿐. - 20p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냅니다. 더/덜, 또는/그리고, 전/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삶이나 죽음 같은 단어들에 의해. - 60p
당신과 나에 관한 두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서와는 거꾸로 놓여 있습니다. 당신이 죽는 이야기 이전에 내가 죽을 뻔했던 이야기가 있거든요. 확실한 건, 상상하지도 못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들었던 1950년 여름의 일요일을 내가 기억한다는 것이에요. 나는 이제야 훨씬 더 세밀하게 봅니다. 릴본의 방과 창 옆에 놓여 있던 부모님 침대, 그 바로 옆의 분홍색 나무로 된 내 침대를. 나는 내 자리에 누워 있는 당신을 봅니다. 죽은 아이는 나예요. - 35p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39p
당신이 거기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그들의 고통으로. - 47p
이 편지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심코 당신을 떠올려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평온하던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마치 꿈을 꾸듯 이끼만 잔뜩 돋은 인적 없는 습지에서 걸음을 내딛는 듯하고, 단어들의 틈새를 헤치고 나아가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아요. 내겐 당신을 위한 언어도, 당신에게 말해야 할 언어도 없으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비존재 상태로 있는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과 정서의 언어 바깥에 있는 당신은 비언어입니다. - 60p
당신은 내 흔적에 얹힌 당신의 흔적을 통해서만 존재할 뿐이지요. 당신에 대해 쓰는 건 존재하지 않는 당신 주위를 맴돌며, 남겨진 부재를 묘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은 글쓰기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형체입니다. - 62
나는 그들의 고통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재 속에서 살았습니다. - 64p
나는 내가 있었던 그곳에 당신을 데려다 놓을 수 없고, 내 존재를 당신의 존재로 바꿀 수 없습니다. 죽음이 있고, 삶이 있지요. 당신 또는 나. 나는 존재하기 위해서 당신을 부인해야만 했어요. - 82p
물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읽지 않을 테니까요. 편지를 받을 사람은 다른 사람들, 바로 독자예요. 내가 이 편지를 쓸 때, 당신만큼이나 보이지 않았던 자들이지요.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편지가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 닿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여름의 일요일에, 어쩌면 튀렝의 방에서 파베세가 자살했던 그날에, 나 역시 수신자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90p
작가 소개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의 이브토에서 자랐다. 루앙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정식 교원,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해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했으며, 자전적인 글쓰기와 역사, 사회를 향한 작가만의 시선을 가공이나 은유 없이 정확하게 담아내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다. 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부끄러움’, ‘다른 딸’ 등이 있으며, 2008년 ‘세월’로 마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소설, 미발표된 일기 등을 수록한 ‘삶을 쓰다’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된 최초의 생존 작가가 되었다.

다른 딸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당신을 되살린 후 다시 죽이기 위해서일까요? (p.26)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당신을 향해 편지를 쓰는 것이다, 그리움도 애틋함도 없이. 당신을 되살린 후, 다시 죽이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딛고 세계를 구성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을 마주하는 작품 <다른 딸>이 출간되었다. 작가가 1984년 르노드 상을 받았던 <남자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삶을,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한 여자>에서 어머니의 인생을 기록하였다면, <다른 딸>이 천착하는 대상은 ‘당신’, 아니 에르노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죽은 언니 지네트이다.
Nil 출판사의 편지 시리즈 기획(‘Les Affranchis’)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한 <다른 딸>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편지를 써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하여 시작되는 이 편지는 아니 에르노 특유의 아름다운 칼날 같은 문체를 통해 우아한 유속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나의 흔적에 얹힌’ 당신을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으로 죽은 언니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촉발된 어린아이의 불안과 혼란, 부재와 존재의 탐구, 그리고 마침내 ‘당신’에 대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온전한 ‘나’로 향하고자 하는 여정이 모두 여기, 이 물결에 스며있다.
목차
다른 딸 - 9p
'나와 당신' (추천사) - 93p
책 속에서
이 일을 이야기로 만드는 건, 60년 전부터 벽장 안에 처박혀 있던 필름을 꺼내어 현상하듯, 흐릿해진 경험을 끄집어내어 이야기에 끝을 내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 14p
해가 지날수록 나는 이 이야기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요. 한 번도 나누지 않았던 언어들만 있을 뿐. - 20p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냅니다. 더/덜, 또는/그리고, 전/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삶이나 죽음 같은 단어들에 의해. - 60p
당신과 나에 관한 두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서와는 거꾸로 놓여 있습니다. 당신이 죽는 이야기 이전에 내가 죽을 뻔했던 이야기가 있거든요. 확실한 건, 상상하지도 못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들었던 1950년 여름의 일요일을 내가 기억한다는 것이에요. 나는 이제야 훨씬 더 세밀하게 봅니다. 릴본의 방과 창 옆에 놓여 있던 부모님 침대, 그 바로 옆의 분홍색 나무로 된 내 침대를. 나는 내 자리에 누워 있는 당신을 봅니다. 죽은 아이는 나예요. - 35p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39p
당신이 거기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그들의 고통으로. - 47p
이 편지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심코 당신을 떠올려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평온하던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마치 꿈을 꾸듯 이끼만 잔뜩 돋은 인적 없는 습지에서 걸음을 내딛는 듯하고, 단어들의 틈새를 헤치고 나아가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아요. 내겐 당신을 위한 언어도, 당신에게 말해야 할 언어도 없으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비존재 상태로 있는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과 정서의 언어 바깥에 있는 당신은 비언어입니다. - 60p
당신은 내 흔적에 얹힌 당신의 흔적을 통해서만 존재할 뿐이지요. 당신에 대해 쓰는 건 존재하지 않는 당신 주위를 맴돌며, 남겨진 부재를 묘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은 글쓰기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형체입니다. - 62
나는 그들의 고통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재 속에서 살았습니다. - 64p
나는 내가 있었던 그곳에 당신을 데려다 놓을 수 없고, 내 존재를 당신의 존재로 바꿀 수 없습니다. 죽음이 있고, 삶이 있지요. 당신 또는 나. 나는 존재하기 위해서 당신을 부인해야만 했어요. - 82p
물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읽지 않을 테니까요. 편지를 받을 사람은 다른 사람들, 바로 독자예요. 내가 이 편지를 쓸 때, 당신만큼이나 보이지 않았던 자들이지요.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편지가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 닿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여름의 일요일에, 어쩌면 튀렝의 방에서 파베세가 자살했던 그날에, 나 역시 수신자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90p
작가 소개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의 이브토에서 자랐다. 루앙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후, 정식 교원,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다. 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해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했으며, 자전적인 글쓰기와 역사, 사회를 향한 작가만의 시선을 가공이나 은유 없이 정확하게 담아내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다. 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부끄러움’, ‘다른 딸’ 등이 있으며, 2008년 ‘세월’로 마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수상했다. 소설, 미발표된 일기 등을 수록한 ‘삶을 쓰다’로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된 최초의 생존 작가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