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로의 책
기후위기, 젠더, 인공지능, 지역, 착취와 돌봄 등 우리 시대가 직면한 다양한 이슈를 ‘제로’라는 키워드로 엮은 책입니다. 지구상의 여러 영역에서 벌어지는 과잉 생산과 소비, 우리 내면의 혐오와 차별, 그 앞에서 예술이 갖는 한계와 가능성 등의 문제를 근본적 토대에서부터 돌아보고, ‘제로’ 이후에 새롭게 대면할 내일을 상상합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질문들은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사업 선정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강민형, 김화용, 전유진 공동기획)을 바탕으로 합니다. 《제로의 예술》은 우리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을 종으로 횡으로 연결하며 예술의 견고한 프레임을 돌아보고, 창작가/시민/활동가 등 현장의 목소리를 불러모아 공공의 장을 만드는 기획이었습니다. 다양한 주제로 총 46회의 워크숍과 14회의 강연을 열었습니다. 11개월간의 프로젝트가 일단락을 맺은 뒤, 더 긴 호흡의 대화, 더 많은 상상과 실천을 마련하기 위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지닌 언어들을 새로이 모아 『제로의 책』이라는 이름으로 엮었습니다.
외양이 조금 특이합니다. 앞표지에는 목차를, 뒷표지에는 판권지를 앉혀 책의 정보들을 외부에 노출했고, 정교한 계산을 통해 내지에 넣은 기호 패턴이 노출사철제본으로 엮은 책등에 제목이 되어 드러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표지와 내지 모두 재생펄프 함유율이 100퍼센트인 종이에 콩기름으로 인쇄했고, 4X6 전지의 24절 사이즈로 버려지는 종이를 최소화했습니다. 본문 폰트의 크기는 시원하게 키우고 유니버셜디자인을 적용해 더 많은 사람이 편히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제작 과정과 만듦새에 여러 모로 고민이 많이 담긴 책입니다.
목차
02 제로의 책 / 여는 글
06 제로를 위한 디자인 잡담 / 어라우드랩
26 메타버그 세계관 / 최승준
48 재야생화: 인류세의 미래를 위한 대담한 상상 / 최명애
66 부모 예술가를 배제하지 않는 방법 / 부록1
70 모든 몸을 위한 발레 / 윤상은
81 창살과 영혼 / 손희정
101 셀카의 기술 / 고아침
110 구축 없는 건축의 구축 / 강현석
132 집과 숲 / 김영주 인터뷰
156 필패하는 말과 토대 없는 믿음 / 안팎
170 어떤 것도 버리지 않기 위한 조각들 / 부록2
176 이것은 상상력의 싸움이다 / 채효정
206 데이터셋 그리고 팅커링 / 송수연
223 퀴어 자손 / 헤더 데이비스
235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 김영옥
258 함께한 사람들
255 만든 사람들
257 도판 출처
책 속으로
첫문장: 근데 제로가 뭘까?
p.65
인간과 비인간의 삶 그 자체는 재난 이후에도 계속된다. 체르노빌이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 사례에서 보듯, 폐허 속에서도 야생 동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삶은 이어지고, 꿈과 희망들은 펼쳐진다. 인류세는 종식과 절멸의 서사만이 아니며, 폐허 속에서 생성되는 ‘재기’와 ‘풍성함’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p.28
세계 인구의 36~45퍼센트 정도는 아직 인터넷에 접근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죠. 인터넷을 쓰지 못하는 곳에 대형 드론을 띄워 인터넷 접근 문턱을 낮추자는 페이스북의 아퀼라 프로젝트는 2016년에 시작해 2018년에 종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지에 풍선을 띄워 무선 인터넷을 공급하는 구글의 룬 프로젝트는 2011년에 시작해 2021년 1월에 종료했습니다. 이러한 프로젝트에는 인터넷이라는 중요한 매체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유통 기한’이 있는 선한 의도와 동시에 아직 인터넷에 접근하지 못하는 인류의 절반이 있는 시장을 개척하고 사업의 규모를 키우려는 영리적 의도가 공존한다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p.184
‘탈석탄’에서는 석탄만 아니라 석탄노동자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탈석탄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숫자’는 알려주지 않는다. 숫자는 많은 것을 속일 수 있다.
p.95
사실 중요한 건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맥두걸의 ‘21그램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 영혼의 존재 여부는 판명될 수 없을 테니까. 그보다 ‘나만이 고결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이 세계를 어떻게 폐허로 만들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영혼’이라는 찬란한 말의 효용이다.
p.128
이 미완성 건축은 45층의 콘크리트 뼈대와 바닥, 그리고 부분적으로 시공되다 멈춘 유리 외피의 모습으로 장기간 방치됐다. 2007년부터 이 ‘죽은 거인’의 몸체에 사람들의 생기가 닿기 시작했다. 카라카스 변두리의 무허가 빈민촌에서 쫓겨난 이들이 하나둘씩 그 텅 빈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2014년에는 약 3천여 명의 주민들이 다비드 타워를 무단 점유하여 거주지로 삼았다.
p.162
비장애인의 세계에서 장애인의 몸이 충분히 준비하고 완벽히 연습된 상태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들은 언제나 시기상조인 상태로 무대에 오른다. 드랙 퍼포머들은 흔히 스스로를 성별화된 단어 - 퀸이나 킹 - 로 칭하면서도, 그리고 그 성별의 기호들로 자신을 치장하면서도, ‘충분히’ 그 성별이 되기를 시도하는 대신 말도 안 되는 괴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런 무대들은 필패하는 몸짓이 여는 공간이다.
p.193
기후위기를 시각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벌겋게 달아오른 지구, 녹아 흘러내리는 지구 이미지는 진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 자체가 지구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인간을 상정한다. 근대인의 관점, 지구에 불을 지른 그 인간의 관점 말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푸른 별 지구라는 표상이 지구인의 위치를 지구 밖으로 이동시켜왔다고 지적한다. 불타는 지구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을 외부자의 관점으로 이동시킨다. 그 시점은 우리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자신을 밖에서 불구경하는 구경꾼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p.248
심리학은 ‘네 안의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나라고 권한다. 유년기가 누구에게나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하고 순연한 햇살로 빛나는 건 아니기에, 어둡고 축축한 그늘에서 여전히 울면서, 일으켜 세워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를 만나는 일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계보학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 필수일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유년기의 아이뿐이 아니다. 노년기의 할머니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할머니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내게 들려줄 말이 있다.










제로의 책
기후위기, 젠더, 인공지능, 지역, 착취와 돌봄 등 우리 시대가 직면한 다양한 이슈를 ‘제로’라는 키워드로 엮은 책입니다. 지구상의 여러 영역에서 벌어지는 과잉 생산과 소비, 우리 내면의 혐오와 차별, 그 앞에서 예술이 갖는 한계와 가능성 등의 문제를 근본적 토대에서부터 돌아보고, ‘제로’ 이후에 새롭게 대면할 내일을 상상합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질문들은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사업 선정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강민형, 김화용, 전유진 공동기획)을 바탕으로 합니다. 《제로의 예술》은 우리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을 종으로 횡으로 연결하며 예술의 견고한 프레임을 돌아보고, 창작가/시민/활동가 등 현장의 목소리를 불러모아 공공의 장을 만드는 기획이었습니다. 다양한 주제로 총 46회의 워크숍과 14회의 강연을 열었습니다. 11개월간의 프로젝트가 일단락을 맺은 뒤, 더 긴 호흡의 대화, 더 많은 상상과 실천을 마련하기 위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지닌 언어들을 새로이 모아 『제로의 책』이라는 이름으로 엮었습니다.
외양이 조금 특이합니다. 앞표지에는 목차를, 뒷표지에는 판권지를 앉혀 책의 정보들을 외부에 노출했고, 정교한 계산을 통해 내지에 넣은 기호 패턴이 노출사철제본으로 엮은 책등에 제목이 되어 드러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표지와 내지 모두 재생펄프 함유율이 100퍼센트인 종이에 콩기름으로 인쇄했고, 4X6 전지의 24절 사이즈로 버려지는 종이를 최소화했습니다. 본문 폰트의 크기는 시원하게 키우고 유니버셜디자인을 적용해 더 많은 사람이 편히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제작 과정과 만듦새에 여러 모로 고민이 많이 담긴 책입니다.
목차
02 제로의 책 / 여는 글
06 제로를 위한 디자인 잡담 / 어라우드랩
26 메타버그 세계관 / 최승준
48 재야생화: 인류세의 미래를 위한 대담한 상상 / 최명애
66 부모 예술가를 배제하지 않는 방법 / 부록1
70 모든 몸을 위한 발레 / 윤상은
81 창살과 영혼 / 손희정
101 셀카의 기술 / 고아침
110 구축 없는 건축의 구축 / 강현석
132 집과 숲 / 김영주 인터뷰
156 필패하는 말과 토대 없는 믿음 / 안팎
170 어떤 것도 버리지 않기 위한 조각들 / 부록2
176 이것은 상상력의 싸움이다 / 채효정
206 데이터셋 그리고 팅커링 / 송수연
223 퀴어 자손 / 헤더 데이비스
235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 김영옥
258 함께한 사람들
255 만든 사람들
257 도판 출처
책 속으로
첫문장: 근데 제로가 뭘까?
p.65
인간과 비인간의 삶 그 자체는 재난 이후에도 계속된다. 체르노빌이나 허리케인 카트리나,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 사례에서 보듯, 폐허 속에서도 야생 동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삶은 이어지고, 꿈과 희망들은 펼쳐진다. 인류세는 종식과 절멸의 서사만이 아니며, 폐허 속에서 생성되는 ‘재기’와 ‘풍성함’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p.28
세계 인구의 36~45퍼센트 정도는 아직 인터넷에 접근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죠. 인터넷을 쓰지 못하는 곳에 대형 드론을 띄워 인터넷 접근 문턱을 낮추자는 페이스북의 아퀼라 프로젝트는 2016년에 시작해 2018년에 종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지에 풍선을 띄워 무선 인터넷을 공급하는 구글의 룬 프로젝트는 2011년에 시작해 2021년 1월에 종료했습니다. 이러한 프로젝트에는 인터넷이라는 중요한 매체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유통 기한’이 있는 선한 의도와 동시에 아직 인터넷에 접근하지 못하는 인류의 절반이 있는 시장을 개척하고 사업의 규모를 키우려는 영리적 의도가 공존한다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p.184
‘탈석탄’에서는 석탄만 아니라 석탄노동자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탈석탄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숫자’는 알려주지 않는다. 숫자는 많은 것을 속일 수 있다.
p.95
사실 중요한 건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아니다. 맥두걸의 ‘21그램설’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 영혼의 존재 여부는 판명될 수 없을 테니까. 그보다 ‘나만이 고결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이 세계를 어떻게 폐허로 만들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영혼’이라는 찬란한 말의 효용이다.
p.128
이 미완성 건축은 45층의 콘크리트 뼈대와 바닥, 그리고 부분적으로 시공되다 멈춘 유리 외피의 모습으로 장기간 방치됐다. 2007년부터 이 ‘죽은 거인’의 몸체에 사람들의 생기가 닿기 시작했다. 카라카스 변두리의 무허가 빈민촌에서 쫓겨난 이들이 하나둘씩 그 텅 빈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2014년에는 약 3천여 명의 주민들이 다비드 타워를 무단 점유하여 거주지로 삼았다.
p.162
비장애인의 세계에서 장애인의 몸이 충분히 준비하고 완벽히 연습된 상태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들은 언제나 시기상조인 상태로 무대에 오른다. 드랙 퍼포머들은 흔히 스스로를 성별화된 단어 - 퀸이나 킹 - 로 칭하면서도, 그리고 그 성별의 기호들로 자신을 치장하면서도, ‘충분히’ 그 성별이 되기를 시도하는 대신 말도 안 되는 괴상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런 무대들은 필패하는 몸짓이 여는 공간이다.
p.193
기후위기를 시각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벌겋게 달아오른 지구, 녹아 흘러내리는 지구 이미지는 진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 자체가 지구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인간을 상정한다. 근대인의 관점, 지구에 불을 지른 그 인간의 관점 말이다. 나오미 클라인은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푸른 별 지구라는 표상이 지구인의 위치를 지구 밖으로 이동시켜왔다고 지적한다. 불타는 지구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을 외부자의 관점으로 이동시킨다. 그 시점은 우리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자신을 밖에서 불구경하는 구경꾼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p.248
심리학은 ‘네 안의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나라고 권한다. 유년기가 누구에게나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하고 순연한 햇살로 빛나는 건 아니기에, 어둡고 축축한 그늘에서 여전히 울면서, 일으켜 세워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를 만나는 일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계보학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 필수일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유년기의 아이뿐이 아니다. 노년기의 할머니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할머니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다. 내게 들려줄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