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귀주행: 여성괴물행진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의미를 아시나요. 캄캄한 밤, 요괴들이 요란스레 돌아다니며 행진한다는 뜻입니다.
2016년의 어느 날, 광화문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해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다가, 저는 한낮에 행진하는 요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에만 목소리와 존재를 드러내는 요괴처럼, 우리도 시위에서 길 위를 점령하고, 목소리를 드러내고, 함께 걷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해가 떠있는 낮이었을 뿐이지요.
유난히 시위에 참여할 일이 많았던 저와 요괴의 닮은 점은 그것 말고도 또 있었습니다.
저희는 돌곶이요괴협회라는 모임에서 세계의 다양한 요괴를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슬픈 요괴 도감》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슬프고 기구한 사연을 가진 요괴들을 모아보니, 여성의 모습을 한 요괴나 귀신, 괴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유럽, 남미에 이르기까지 국적을 불문하고 ‘여성형 괴물’들은 모두 다르지만 닮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거나 더럽고 추레한 노파였습니다. 또는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엄마였고, 아내 또는 엄마가 되는 일에 실패했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임신, 출산 혹은 아기, 양육과 관련 있는 경우가 꽤 있었고요.
“모든 괴물들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들에 직접적으로 말을 겁니다. 여성괴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여성들의 그들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 한국판 서문 중
여성학자 바바라 크리드의 말처럼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평범’하거나 ‘정상’이 아닌 존재는 쉽게 괴물이 됩니다. 무서운 이야기 속 귀신과 괴물은 대부분 산 사람의 믿음이 투영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공포와 불안,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것을 믿기로 합니다.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나 잡아먹힐까봐 두려워서, 처녀로 죽는 것이 두려워서, 또는 여자들이 영영 아이를 낳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이처럼 괴물 이야기는 인간의 유희이자 경고로 쓰입니다.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아이를 낳고 죽지 않으면 너도 끔찍한 귀신이 될거야.” 그리고 이 경고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시대와 대륙을 막론하고 어떤 여자들이 괴물이 된 이유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억압과 혐오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괴물이지 않을까요?
모든 여성형 요괴를 “임신”과 “출산”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서 출발해 우리가 만드려는 책의 주제를 넓히기로 했습니다. 재생산권 운동에 참여해 보거나 관련 의제에 목소리를 내어 본 페미니스트들의 인터뷰를 담아내어 “몸과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말”을 여성형 괴물, “여성괴물 이야기”와 교차시켜 보려고 합니다.
“충격적이고, 공포스럽고, 끔찍하며, 비천”하게 그려진 여성괴물들에게는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이들을 새롭게 쓴다면, 이들이 지닌 “충격적이고, 공포스럽고, 끔찍하며, 비천”하다는 오해와 편견을 풀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시간을 뛰어 넘어 현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 행진하고 구호를 외친다면 어떨까요?
어떤 여자들은 죽어서 괴물이 되어야 했고, 어떤 여자들은 괴물처럼 싸우며 살아갑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부장제의 언어로 괴물로 기록되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쓰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여성’ ‘괴물’들의 연대와 투쟁을 상상하며, 우리는 이 책에 여성괴물과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목차
일러두기
여는 글
본문
- 한국의 여성괴물: 손각시
- 한국의 여성 활동가 인터뷰: 페미당당의 지안
-아일랜드의 여성괴물: 밴시
- 아일랜드의 여성 활동가 인터뷰: ARC의 헬렌 스톤하우스
- 에콰도르의 여성괴물: 툰다
- 에콰도르의 여성 활동가 인터뷰: 라스 마틸데스의 레베카 산체스 몬테네그로
- 말레이시아의 여성괴물: 랭수이르
- 말레이시아의 여성 활동가 인터뷰: FYIKL의 파라 롬
- 일본의 여성괴물: 우부메
- 일본의 활동가 인터뷰: 야만바의 칸나, 마루리나
그림: 여성괴물행진을 시작한다
참고문헌
작가 소개
초우상회
영화를 좋아하는 공통점을 지닌 두 친구가 2012년부터 운영해 왔습니다. 좋아하는 영화의 굿즈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그때그때 관심이 있는 의제와 좋아하는 것들을 다뤄왔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만큼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은 두 사람은,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하고 파생되는지, 이야기로 어떻게 이어지고 연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돌곶이요괴협회와 함께 귀여운 요괴를 소개하는 포켓도감 “귀여운 요괴 도감”과 슬픈 사연을 지닌 요괴를 소개하는 “슬픈 요괴 도감”을 펴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howsesang/
https://twitter.com/chow_goods
백귀주행: 여성괴물행진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의미를 아시나요. 캄캄한 밤, 요괴들이 요란스레 돌아다니며 행진한다는 뜻입니다.
2016년의 어느 날, 광화문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해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다가, 저는 한낮에 행진하는 요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에만 목소리와 존재를 드러내는 요괴처럼, 우리도 시위에서 길 위를 점령하고, 목소리를 드러내고, 함께 걷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이 해가 떠있는 낮이었을 뿐이지요.
유난히 시위에 참여할 일이 많았던 저와 요괴의 닮은 점은 그것 말고도 또 있었습니다.
저희는 돌곶이요괴협회라는 모임에서 세계의 다양한 요괴를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슬픈 요괴 도감》이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슬프고 기구한 사연을 가진 요괴들을 모아보니, 여성의 모습을 한 요괴나 귀신, 괴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유럽, 남미에 이르기까지 국적을 불문하고 ‘여성형 괴물’들은 모두 다르지만 닮은 구석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거나 더럽고 추레한 노파였습니다. 또는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엄마였고, 아내 또는 엄마가 되는 일에 실패했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임신, 출산 혹은 아기, 양육과 관련 있는 경우가 꽤 있었고요.
“모든 괴물들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들에 직접적으로 말을 겁니다. 여성괴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여성들의 그들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바바라 크리드, ‘여성괴물’ 한국판 서문 중
여성학자 바바라 크리드의 말처럼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평범’하거나 ‘정상’이 아닌 존재는 쉽게 괴물이 됩니다. 무서운 이야기 속 귀신과 괴물은 대부분 산 사람의 믿음이 투영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공포와 불안,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것을 믿기로 합니다.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나 잡아먹힐까봐 두려워서, 처녀로 죽는 것이 두려워서, 또는 여자들이 영영 아이를 낳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이처럼 괴물 이야기는 인간의 유희이자 경고로 쓰입니다.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아이를 낳고 죽지 않으면 너도 끔찍한 귀신이 될거야.” 그리고 이 경고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시대와 대륙을 막론하고 어떤 여자들이 괴물이 된 이유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억압과 혐오와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괴물이지 않을까요?
모든 여성형 요괴를 “임신”과 “출산”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서 출발해 우리가 만드려는 책의 주제를 넓히기로 했습니다. 재생산권 운동에 참여해 보거나 관련 의제에 목소리를 내어 본 페미니스트들의 인터뷰를 담아내어 “몸과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말”을 여성형 괴물, “여성괴물 이야기”와 교차시켜 보려고 합니다.
“충격적이고, 공포스럽고, 끔찍하며, 비천”하게 그려진 여성괴물들에게는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로 이들을 새롭게 쓴다면, 이들이 지닌 “충격적이고, 공포스럽고, 끔찍하며, 비천”하다는 오해와 편견을 풀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시간을 뛰어 넘어 현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거리로 나서 행진하고 구호를 외친다면 어떨까요?
어떤 여자들은 죽어서 괴물이 되어야 했고, 어떤 여자들은 괴물처럼 싸우며 살아갑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부장제의 언어로 괴물로 기록되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쓰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 ‘여성’ ‘괴물’들의 연대와 투쟁을 상상하며, 우리는 이 책에 여성괴물과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목차
일러두기
여는 글
본문
- 한국의 여성괴물: 손각시
- 한국의 여성 활동가 인터뷰: 페미당당의 지안
-아일랜드의 여성괴물: 밴시
- 아일랜드의 여성 활동가 인터뷰: ARC의 헬렌 스톤하우스
- 에콰도르의 여성괴물: 툰다
- 에콰도르의 여성 활동가 인터뷰: 라스 마틸데스의 레베카 산체스 몬테네그로
- 말레이시아의 여성괴물: 랭수이르
- 말레이시아의 여성 활동가 인터뷰: FYIKL의 파라 롬
- 일본의 여성괴물: 우부메
- 일본의 활동가 인터뷰: 야만바의 칸나, 마루리나
그림: 여성괴물행진을 시작한다
참고문헌
작가 소개
초우상회
영화를 좋아하는 공통점을 지닌 두 친구가 2012년부터 운영해 왔습니다. 좋아하는 영화의 굿즈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그때그때 관심이 있는 의제와 좋아하는 것들을 다뤄왔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만큼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은 두 사람은,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하고 파생되는지, 이야기로 어떻게 이어지고 연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돌곶이요괴협회와 함께 귀여운 요괴를 소개하는 포켓도감 “귀여운 요괴 도감”과 슬픈 사연을 지닌 요괴를 소개하는 “슬픈 요괴 도감”을 펴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howsesang/
https://twitter.com/chow_goo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