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의 숲
폭설과 함께 마주한 상실의 몽타주, 우리가 끝내 두고 온 것들이 그려낸 눈부신 초상화!
윤탐 작가의 첫 장편소설 『이후의 숲』은 납득할 수 없는 관계의 결말, 그로 인해 지독한 상실의 후유증을 앓는 삶을 그려낸다. 주인공은 폭설로 고립된 산중에서 기억을 잃은 이와 한철을 지내며 자신이 가진 내면의 상처를 고요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후의 숲』은 윤탐 작가가 기획한 ‘침입 3부작’의 첫 번째 소설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을 뒤흔들 만큼 무시무시한 일이기도 하다. 평온하고 지지부진한 나의 삶에 누군가 들어옴으로써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일, 그러한 만남은 도적과도 같은 침입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침입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인 『이후의 숲』은 침입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만남과 상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침입 3부작’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며 각자 독립적인 이야기를 지닌 소설들이 될 것이다.
목차
이후의 숲 _6p
발문 _226p
작가의 말 _230p
책 속으로
하지만 그는 평온해보였다. 얼굴뿐 아니라 사소한 몸짓과 짧게 오가는 말 몇 마디에서도 평온함이 묻어났다. 마치 내면 깊숙한 곳에 평온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본성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듯이. 둥근 눈매가 선하고 평온한 인상을 매끄럽게 모아주고 있었다. 겨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사건사고들을 고요히 덮어버리는 흰 눈. 눈이 오고, 눈이 쌓이고, 그리하여 온 세상을 침묵에 함몰시키는 동시에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만드는 겨울. 혼란스러움은 입 속의 혀처럼 감춘 채 평온만을 드러내는, 눈 내리는 겨울과 닮아있었다. (p.23)
지금까지 재이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었다. 이유를 묻지 않고. 그것은 호의나 선의 따위가 아니라 선을 긋는 것이었다. 해달라는 건 다 해줄게, 이유는 안 궁금해. 언젠가 떠날 사람이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나는 내심 정을 쏟는 동시에 정을 거두려했는지 모른다. 두려웠다. 혹여나 그에게 정이라도 붙였다가 의문투성이의 이별만 남게 될까봐. (p.81)
해결되지 않은 관계에 마음이 쏠렸다. 오랜 시간 잊지 못하고 곱씹었던 관계들은 그 끝이 납득되지 않는 관계들이었다. 나는 매순간 닥쳐오는 삶의 순간들을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이해하려 해왔다. 이해 가능해야 넘어갈 수 있었다. 논리와 감정을 모두 이해시키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한쪽만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럴 경우 찝찝하더라도 고개는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납득되지 않는 경우, 관계의 끝은 미궁으로 남아 나를 집어 삼켰다. (p.153)
그럴 때가 있잖아요,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따금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느낄 때. 깨달음이 삶을 한 단계 위로 올려주지 않아요. 삶은 계단이 아니라 에스컬레이터예요.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말고,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우리의 목적지는 위쪽인데 말이죠. 계속 걸어야 해요. 그래야 겨우 더 내려가지 않고 제자리나마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더 올라갈 수 있으면 좋은 거고.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달음대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죠. (p.156)
창문을 살짝 열고 내뿜은 연기는 눈만큼 희었으나 눈보다 탁했다. 담배연기가 매캐한 느낌도 없이 목구멍을 넘나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겨울바람이 연기와 함께 목구멍을 내달렸지만 속은 꽉 막힌 듯 좀처럼 편하지 않았다. 종종 이런 때가 있었다. 가슴에 얹힌 감정은 이따금 울음으로 눈앞까지 벅차올랐다가, 몰아쉬는 한숨 한 번에 서늘한 감각만을 남기고 증발했다. (p.159-160)
현재는 과거로 시든다. 존재하는 것은 기억뿐이다. 현재라는 도시에 이따금 기억이라는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기억이라는 도시에 끊임없이 현재라는 눈이 내리고, 녹고, 드물게 얼어붙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재는 녹아 사라지고 남는 것은 얼어붙은 기억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순간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다. (p.218)
작가 소개
윤탐
비 오는 날과 에픽하이, 타자를 칠 때 나는 소리를 좋아한다.
그 외의 것들은 대부분 귀찮거나 싫어하며, 글만 쓰기 위해서 글 이외의 것들에 힘을 쓰는 아이러니한 나날들을 지나고 있다.
이후의 숲
폭설과 함께 마주한 상실의 몽타주, 우리가 끝내 두고 온 것들이 그려낸 눈부신 초상화!
윤탐 작가의 첫 장편소설 『이후의 숲』은 납득할 수 없는 관계의 결말, 그로 인해 지독한 상실의 후유증을 앓는 삶을 그려낸다. 주인공은 폭설로 고립된 산중에서 기억을 잃은 이와 한철을 지내며 자신이 가진 내면의 상처를 고요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후의 숲』은 윤탐 작가가 기획한 ‘침입 3부작’의 첫 번째 소설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을 뒤흔들 만큼 무시무시한 일이기도 하다. 평온하고 지지부진한 나의 삶에 누군가 들어옴으로써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일, 그러한 만남은 도적과도 같은 침입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침입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인 『이후의 숲』은 침입만큼이나 갑작스러운 만남과 상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침입 3부작’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며 각자 독립적인 이야기를 지닌 소설들이 될 것이다.
목차
이후의 숲 _6p
발문 _226p
작가의 말 _230p
책 속으로
하지만 그는 평온해보였다. 얼굴뿐 아니라 사소한 몸짓과 짧게 오가는 말 몇 마디에서도 평온함이 묻어났다. 마치 내면 깊숙한 곳에 평온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본성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듯이. 둥근 눈매가 선하고 평온한 인상을 매끄럽게 모아주고 있었다. 겨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사건사고들을 고요히 덮어버리는 흰 눈. 눈이 오고, 눈이 쌓이고, 그리하여 온 세상을 침묵에 함몰시키는 동시에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만드는 겨울. 혼란스러움은 입 속의 혀처럼 감춘 채 평온만을 드러내는, 눈 내리는 겨울과 닮아있었다. (p.23)
지금까지 재이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었다. 이유를 묻지 않고. 그것은 호의나 선의 따위가 아니라 선을 긋는 것이었다. 해달라는 건 다 해줄게, 이유는 안 궁금해. 언젠가 떠날 사람이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나는 내심 정을 쏟는 동시에 정을 거두려했는지 모른다. 두려웠다. 혹여나 그에게 정이라도 붙였다가 의문투성이의 이별만 남게 될까봐. (p.81)
해결되지 않은 관계에 마음이 쏠렸다. 오랜 시간 잊지 못하고 곱씹었던 관계들은 그 끝이 납득되지 않는 관계들이었다. 나는 매순간 닥쳐오는 삶의 순간들을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이해하려 해왔다. 이해 가능해야 넘어갈 수 있었다. 논리와 감정을 모두 이해시키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한쪽만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럴 경우 찝찝하더라도 고개는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납득되지 않는 경우, 관계의 끝은 미궁으로 남아 나를 집어 삼켰다. (p.153)
그럴 때가 있잖아요,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따금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느낄 때. 깨달음이 삶을 한 단계 위로 올려주지 않아요. 삶은 계단이 아니라 에스컬레이터예요.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말고,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우리의 목적지는 위쪽인데 말이죠. 계속 걸어야 해요. 그래야 겨우 더 내려가지 않고 제자리나마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더 올라갈 수 있으면 좋은 거고.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달음대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죠. (p.156)
창문을 살짝 열고 내뿜은 연기는 눈만큼 희었으나 눈보다 탁했다. 담배연기가 매캐한 느낌도 없이 목구멍을 넘나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겨울바람이 연기와 함께 목구멍을 내달렸지만 속은 꽉 막힌 듯 좀처럼 편하지 않았다. 종종 이런 때가 있었다. 가슴에 얹힌 감정은 이따금 울음으로 눈앞까지 벅차올랐다가, 몰아쉬는 한숨 한 번에 서늘한 감각만을 남기고 증발했다. (p.159-160)
현재는 과거로 시든다. 존재하는 것은 기억뿐이다. 현재라는 도시에 이따금 기억이라는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기억이라는 도시에 끊임없이 현재라는 눈이 내리고, 녹고, 드물게 얼어붙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재는 녹아 사라지고 남는 것은 얼어붙은 기억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과거의 순간과 현재의 순간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다. (p.218)
작가 소개
윤탐
비 오는 날과 에픽하이, 타자를 칠 때 나는 소리를 좋아한다.
그 외의 것들은 대부분 귀찮거나 싫어하며, 글만 쓰기 위해서 글 이외의 것들에 힘을 쓰는 아이러니한 나날들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