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봇의 결함 3
제2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집에 모이다〉로 데뷔하여 꿈과 기억,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을 발표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이치은 작가 소설.
현재가 아닌 근미래,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로봇의 결함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의 탐정 필립 말로의 까칠함을 장착한 주인공이 로봇의 결함을 접수 받고 그들을 만나러 가면서 펼쳐지는 좌충우돌 스물다섯 가지 에피소드와 다섯 개의 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욕을 하는 해안 인명 구조 로봇 조라, 잠수를 타는 교통 경찰 로봇 포그,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웃어버린 간병인 로봇 헨리, 손님들의 물건을 훔치는 호텔 청소 로봇 유춘, 야반도주하는 파씨, 전원을 끈 채 비행기의 짐칸에서 운송되는 것에 민원을 제기한 세계 최고의 수의사로봇 끼릴로프까지 여러 사연을 가진 로봇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만나는 결함을 가진 로봇들은 흥미롭게도 인간을 닮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닮았기 때문에 결함이라는 딱지가 붙은 로봇들. 인간적인, 매우 인간적인 로봇들의 이야기.
목차
1. 대형 마트 시식 코너 로봇, 마리 8
2. 동아시아 포커 챔피언 로봇, 민수
3. 수직 인간 운반기 로봇, 해터
4. 전투기 조종석 경첩 설계 로봇, 토로욧
5. 주말 문예 강좌반에서 시를 가르치는 로봇, 훌리오
6. 세 번째 꿈 - 푸른색 권총을 든 사내
책 속으로
평일 오전의 마트는 늘 마감시간을 코앞에 두고 찾았던 평일 저녁의 마트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따가운 인공 태양이 진열대마다 그득그득한 상품들을 따사로이 어루만지고, 유쾌한 행진곡이 발바닥을 근질이고, 아무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유니폼 인간들이 당장이라도 내게 윙크를 날릴 것 같은 곳. 아무도 바빠 보이지 않았고 아무도 성나 있지 않았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거나 충족되기 직전이었다.
p.21 「대형 마트 시식 코너 로봇, 마리 8」“올해 세계 64강 초청전에 초대된 선수들 중, 사람이 몇인지 아나?”
(...)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3년 전엔 사람이 한 명도 64강에 들지 못했어. 그야말로 로봇만의 잔치였지...... 그런데도 왜 이 대회가 계속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어 두는지 알겠나?”
p.40-41 「동아시아 포커 챔피언 로봇, 민수」“오늘은 많이 우울해 보이세요.” “네가 우울한 게 어떤 건지 알긴 하니?” “음...... 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우울해 보이는 게 어떤 건지 아는 거죠. 저는 5억개가 넘는 우울해 보이는 얼굴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거든요.”
p.56 「수직 인간 운반기 로봇, 해터」로봇이 사람을 배신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명쾌한 답이 손에 떨어지지 않았다.
p.67 「전투기 조종석 경첩 설계 로봇, 토로욧」하늘은 파랬고, 꽃잎은 분홍이었고, 길은 꽃잎의 시체들로 얼룩덜룩했고, 무명(無名)의 생선은 은빛이었고, 국수는 붉었고, 태양은 그 모든 것에서 조금씩 색깔을 꺼내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고, 나는 슬펐다.
p.91 「주말 문예 강좌반에서 시를 가르치는 로봇, 훌리오」시인이 되고 싶나? 검은 기차가 풀어 놓은 증기 더미 속에서 그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회색빛 안개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향해 겨눠진 푸른 총신만은 비교적 뚜렷하게 보였다.
p.105 「세번째 꿈 - 푸른색 권총을 든 사내」
저자 소개
이치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1998)로 제22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로 장편소설 『유 대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2003), 꿈에 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다룬 『비밀 경기자』 (2009), 『노예, 틈입자, 파괴자』 (2014), 시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 『키브라, 기억의 원점』 (2015), 소설집 『보르헤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논쟁』 (2018) 그 후 『마루가 꺼진 은신처』 (2018)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평소 독서광인 그가 좋아하는 책들에서 주운 부스러기들로 첫 에세이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 (2020)를 발표했다.















로봇의 결함 3
제2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권태로운 자들, 소파씨의 집에 모이다〉로 데뷔하여 꿈과 기억, 시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을 발표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온 이치은 작가 소설.
현재가 아닌 근미래,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로봇의 결함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의 탐정 필립 말로의 까칠함을 장착한 주인공이 로봇의 결함을 접수 받고 그들을 만나러 가면서 펼쳐지는 좌충우돌 스물다섯 가지 에피소드와 다섯 개의 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욕을 하는 해안 인명 구조 로봇 조라, 잠수를 타는 교통 경찰 로봇 포그,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웃어버린 간병인 로봇 헨리, 손님들의 물건을 훔치는 호텔 청소 로봇 유춘, 야반도주하는 파씨, 전원을 끈 채 비행기의 짐칸에서 운송되는 것에 민원을 제기한 세계 최고의 수의사로봇 끼릴로프까지 여러 사연을 가진 로봇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만나는 결함을 가진 로봇들은 흥미롭게도 인간을 닮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닮았기 때문에 결함이라는 딱지가 붙은 로봇들. 인간적인, 매우 인간적인 로봇들의 이야기.
목차
1. 대형 마트 시식 코너 로봇, 마리 8
2. 동아시아 포커 챔피언 로봇, 민수
3. 수직 인간 운반기 로봇, 해터
4. 전투기 조종석 경첩 설계 로봇, 토로욧
5. 주말 문예 강좌반에서 시를 가르치는 로봇, 훌리오
6. 세 번째 꿈 - 푸른색 권총을 든 사내
책 속으로
평일 오전의 마트는 늘 마감시간을 코앞에 두고 찾았던 평일 저녁의 마트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따가운 인공 태양이 진열대마다 그득그득한 상품들을 따사로이 어루만지고, 유쾌한 행진곡이 발바닥을 근질이고, 아무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유니폼 인간들이 당장이라도 내게 윙크를 날릴 것 같은 곳. 아무도 바빠 보이지 않았고 아무도 성나 있지 않았고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충족되어 있거나 충족되기 직전이었다.
p.21 「대형 마트 시식 코너 로봇, 마리 8」“올해 세계 64강 초청전에 초대된 선수들 중, 사람이 몇인지 아나?”
(...)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3년 전엔 사람이 한 명도 64강에 들지 못했어. 그야말로 로봇만의 잔치였지...... 그런데도 왜 이 대회가 계속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어 두는지 알겠나?”
p.40-41 「동아시아 포커 챔피언 로봇, 민수」“오늘은 많이 우울해 보이세요.” “네가 우울한 게 어떤 건지 알긴 하니?” “음...... 아니요. 정확히 말하면 우울해 보이는 게 어떤 건지 아는 거죠. 저는 5억개가 넘는 우울해 보이는 얼굴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거든요.”
p.56 「수직 인간 운반기 로봇, 해터」로봇이 사람을 배신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지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명쾌한 답이 손에 떨어지지 않았다.
p.67 「전투기 조종석 경첩 설계 로봇, 토로욧」하늘은 파랬고, 꽃잎은 분홍이었고, 길은 꽃잎의 시체들로 얼룩덜룩했고, 무명(無名)의 생선은 은빛이었고, 국수는 붉었고, 태양은 그 모든 것에서 조금씩 색깔을 꺼내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고, 나는 슬펐다.
p.91 「주말 문예 강좌반에서 시를 가르치는 로봇, 훌리오」시인이 되고 싶나? 검은 기차가 풀어 놓은 증기 더미 속에서 그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회색빛 안개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향해 겨눠진 푸른 총신만은 비교적 뚜렷하게 보였다.
p.105 「세번째 꿈 - 푸른색 권총을 든 사내」
저자 소개
이치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 졸업 후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 (1998)로 제22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로 장편소설 『유 대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2003), 꿈에 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다룬 『비밀 경기자』 (2009), 『노예, 틈입자, 파괴자』 (2014), 시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 『키브라, 기억의 원점』 (2015), 소설집 『보르헤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논쟁』 (2018) 그 후 『마루가 꺼진 은신처』 (2018)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평소 독서광인 그가 좋아하는 책들에서 주운 부스러기들로 첫 에세이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 (2020)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