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소설/시]실패에 고통받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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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북스x<기획회의> 2024 동네서점대상 03

실패에 고통받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고스트북스는 2017년에 영업을 시작한 대구의 작은서점이자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독립출판사입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며, 온오프라인서점을 통해 단행본, 립출판물, 해외 서적, 작가들의 프린트와 굿즈 등을 판매합니다. 더불어 비정기적인 전시 및 ‘유령의 책 만들기’ 워크숍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스트’북스인지 궁금해하실 분도 한 분쯤은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쌓인 이야기를 우리는 글, 그림, 사진 혹은 그 밖의 다양한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통해 남기고자 합니다. 오랜, 자신만의 고독한 시간을 통해서 말이죠. 깊은 내면의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세상 밖으로 자신의 결과물을 보여줄 때, 우린 그들의 존재감을 강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느끼게 됩니다. 마치 ‘유령’처럼 말이죠. 저흰 그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일상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결과물을 세상에 딱! 선보이는 그런 유령들의 이야기를 말이죠. 물론 저희 고스트북스 운영자 두 명 또한 유령입니다.

신혼여행 때의 일입니다. 서점을 오픈하고 대략 1년이 지난 시점, 저희 부부는 업무에 참고가 될만한 리서치에 여행의 일부를 할애하기로 했습니다. 베를린의 서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고스트북스를 찾는 분들께 좋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책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물론 그 속에는 저와 아내 각각의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소비도 있었고 말이죠. 크게 겹치지 않는 각자의 취향 덕분에 저녁이면 서로가 구매한 책들에 관한 소개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좋다고 모든 걸 가질 순 없다는 게 세상의 이치겠지요. 준비한 예산 속에서 고르고 또 고르며 신중하게 구매를 해야 했고, 그렇기에 지갑을 열기 위해선 적지 않은 확신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런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저는 한 권의 책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운명처럼 발견한 한 권의 책

‘Pro qm’은 1999년에 오픈한 서점으로 건축, 예술, 디자인, 문화, 비평 및 이론에 관한 도서를 소개하며, 정기적으로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곳입니다. 베를린에서 방문한 서점 중 특히나 제 마음에 들었기에 꽤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 곳곳이 감각적인 책들로 가득 차 있던 그곳에서 한 권의 책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 독일이라는 나라에 있는 서점이긴 했지만 영어로 된 책들이 대부분의 서가와 매대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책은 생각보다 텍스트가 많지 않았으며, 수록된 사진도 꽤 많았습니다. 공교육과 대학 과정에서 배운 영어 실력만으로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였기에 읽는 데에 큰 어려움도 없었죠.

하지만 이 책이 제 이목을 사로잡은 이유는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위화감’이었습니다. 겉표지 상단 주황 배경색의 짙은 글씨체에 눈이 가 문득 손을 뻗었지만, 들고보니 일본 만화책과 같이 우철로 묶인 형태였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펼침 형태가 아닌, 반대로 넘기는 방식으로 인쇄가 되어 있었죠. 표지가 그랬으니 ‘아, 그런가 보다’ 싶어 첫 장을 넘겼지만 어디에서도 차례나 서문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게 맞는 건가’ 싶던 순간 혹시나 해 책을 뒤집어 보았습니다. 뒷면에는 뒷면에 걸맞은 발췌 글과 가격표, 그리고 출판사의 로고가 들어가 있었고, 그렇게 책을 펼치기도 전에 이리저리 외형만보다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죠.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쪽 번호’의 존재를 말이죠. 간편하게 확인할 수 있는 쪽 번호를 기준으로 책의 순서를 파악하면 되겠다 생각하며 다시금 훑어보니… 네, 뒷면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 표지였고, 제목이 있어 표지라고 생각했던 면이 뒷면이었다는 걸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책의 제목이 단지 ‘텍스트적’ 의미로만이 아닌, ‘경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에릭 케셀스의 『FAILED IT!』(PHAIDON)은 우리 인생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실수의 예시들을 나열하고, 나아가 그것을 아이디어로 바꾸는 방법과 성공적으로 일을 망칠 수 있게 하는 조언을 전합니다. 더불어 그 실패 속에서 신선한 영감을 받고, 완벽을 추구하는 끝없는 탐색이 아닌 의도적인 실패를 찾아 나서는 것을 장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죠. 목차만 보더라도 ‘위대한 실패’ ‘행복한 실패’ ‘실패를 찬미하라’ 등 일반적으로 ‘실패’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들과 완전히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더듬더듬 본문을 읽는 동안, 그리고 함께 수록된 사진들을 보는 동안 이 책에 대한 저의 흥미는 더욱 그 크기를 키워갔습니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관심은 곧바로 결제에 관한 결정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저는 지갑을 활짝,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열어젖혔습니다.

아슬아슬한 예산 줄다리기 속에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지갑을 연다는 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매 소비의 순간에도 여행 이후를 생각해야만 했고, 지출의 이유 또한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소비를 이어가는 순간 속에서 이런 책을 만난다면 이유를 굳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어져 버립니다. 숫자로 점철된 고민보단 나의 삶을 좀더 풍성하게 해줄, 반복되는 삶에 윤활유와 같은 역할이 될 것이라는 가치에 더 주안점을 둘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아마 이것은 여행이기에 느낄 수 있는 묘미이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일상에서도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곤 하겠지만 익숙했던 지역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낯선, 그 속에서 나의 흥미를 이끌고 신경을 잡아채는 것들이 속속들이 숨어 있는 그런 곳에서 이런 소중한 책을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일상에서의 내 삶에 플러스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나는 일. 내가 생활해 나가는 곳과 전혀 다른 곳에서 만난 무언가를 내 일상으로 이끌어 오는 일. 그게 바로 여행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기쁨이자 우리가 돈을 모아가면서까지, (그래선 안 되겠지만) 빚을 내면서까지 여행을 가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과의 인연이 이어지는 기쁨

그렇게 갑작스레 만난 이 책과의 인연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여행 중에 사온 책들 중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책방에서의 간단한 전시를 통해, 다른 책방에서 진행된 ‘서점지기 추천 도서 전시’ 리스트 상단에 올리는 것을 통해 제 나름의 방식으로 널리 알렸습니다. 좋은 책은 널리 알려야 한다는, ‘책방 주인’이라는 사회적 역할에 걸맞은 노력이었죠. 하지만 세상엔 읽기에, 보기에, 그리고 간직하기에 좋은 책들이 너무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결국 이 책은 시간이 흘러가며 자연스레 저의 시선에서 벗어나 제 방 서가의 수많은 책들 속에 파묻혔습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갑니다. 이후 2023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제 기억 속 저편에 사라져 흔적도 찾기 힘들던 이 책은 단 한 통의 메일로 다시금 생명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책방을 운영하는 분들이라면 이해할 것입니다. 하루에도 입고 요청에 관한, 새로운 신간에 관한 수많은 메일이 쏟아진다는 것을 말이죠. 하루만 체크하지 않아도 “얼른 클릭해 날 읽었다는 표시를 남겨줘!”라며 울부짖는 소식들이 부지불식간에 가득 쌓입니다. 문제는 저희 책방이 15평 남짓 되는, 모든 책을 수용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공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채우고 또 채워진 공간, 그 틈에 또 다른 책을 넣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 기준에 혹은 함께 운영하는 아내의 기준에 부합하는 책들을 선별해야만 했고, 거기엔 적지 않은 물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게 되었죠. 그래서 입고 요청에 관한 메일을 클릭하기 전엔 굳은 다짐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날도 한 해를 마무리하며 정산 작업이니 결산 작업이니 1년을 끝맺는 업무들로 분주한 와중이었습니다. 여러 메일이 쌓여 있었지만 기존에 거래하는 곳은 먼저 확인하고 있었기에, ‘피크닉(piknic)’에서 온 도서 소개 메일을 큰 부담 없이 클릭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이 메일만 읽고 신간을 검토한 뒤 다음에 할, 또 그다음에 할, 또또 그다음에 할 일들을 처리하자 생각하던 뒤죽박죽 뒤엉킨 머릿속은 메일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그 순간, 다른 모든 업무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경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신간을 소개하며 책방으로 한 권 보내주신다는 담당자님의 글과 함께 있던 링크에는 아득히 제 기억 속 편린이 되어 사라져 가던 한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한때 주변 여러 사람에게 추천하던 『FAILED IT!』이 『실패했다!』라는 한국어 제목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의 그 주황 배경색에 짙은 볼드체로 적힌 제목은 역시나 책의 ‘뒷면’에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실수를 아이디어로 바꾸는 방법과 성공적으로 일을 망칠 수 있는 기타 조언’이라는 깔끔한 부제와 함께 다시 태어난 이 책이 마침내 저의 ‘모국어’인 한글판으로 갑작스레 제 삶에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반가운 마음은 그 순간 다른 모든 업무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메일을 확인한 그 즉시 답장을 보내 반가운 마음을 허겁지겁 전달하게 했고,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닐까 싶어 흥분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잊고 있던 아주 좋은 책에 대한 저의 기억도 완벽하게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저는 서가 속 깊이 숨어 있던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어보며 한 해의 끝에, 그리고 시작에 갑작스레 다시 만난 이 행운을 감격스러워할 수 있었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반복되는 삶의 한 단면에 불과할 수도 있을 한 권의 책과의 만남이 왜 제게 이런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 말이죠. 물론 그것은 이미 알고 있던, 좋아했던 책의 한글판 도서 발간 소식이라는 엄청나게 특이하지만은 않은 사실에 ‘기준치가 넘은 흥분을 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세상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또한 서점이라는 공간을 운영하면 필연적으로 수많은 책들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온라인을 통해서건, 종종 리서치를 위해 방문하는 교보문고나 알라딘 등 대형 오프라인서점에서건 말이죠. 하지만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왜 이 책이 저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을까요? 단지 책의 외형이 예뻐서? 컬러 조합이 인상적이거나 앞서 언급했듯 펼침의 기준이 달라서? 물론 물리적인 매력도 한몫을 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좀더 정확한 이유를 찾기 위해선 제 내면을 들여다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책이 제게 정말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 말이죠.


실패라는 메아리를 덮는 큰 외침

조금은 혼란스러운 과거를 보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학창 시절, 높은 교육열에 나름 준수했던 성적도 항상 모자라다는 어머니의 기준에 대한 반동으로 딱 필요한 만큼의 노력만 할 뿐 가장 중요한 진로에 관한 고민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말이죠.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무관심했던 제 미래에 대한 고찰은 외부의 기준이 추동한 결과만 행했을 뿐 정말 저 자신을 위한 깊은 고민과 그에 비롯된 행동은 하지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원치 않았던 공부를 하고, 취업을 하게 되었고 엔지니어로 약 1년 반이라는 시간을 살았습니다. 쉽게 휘발될 ‘추억’이라 생각했던 여러 기억들을 지나 마침내 저는 김인철이라는 한 개인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여러 도움을 받아 (특히 현재 아내의 도움을 받아) 퇴사를 하고 마침내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현재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학창 시절과 대학 시절, 그리고 직장을 다니던 긴 시간을 스스로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항상 다른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 저 자신을 인식 했기에 진정한 ‘나’를 찾는 데엔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이죠. 그렇게 흘러간 시간을 바라보며 제 내면에서는 옳지 않은 길이었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던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항상 실패한 삶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며 열심히 삶을 가꾸어 가는 지금의 순간보다 더 큰 영향력으로 저의 무의식을 점유하고 있던 그 실패에 대한 인식에는 베를린에서 이 책을 만났던 순간 문득 작지만 깊은 균열이 갔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걸 찾는 데에 소요된 시간이 아무리 길었더라도 결국 찾아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걸, 이 책은 제게 실패라는 메아리를 덮는 큰 외침으로 알려주고 있었죠. 그래서 위안이 되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길었던 방황의 시간에 대한 대답과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현재의 일을 하고 있는 지금에 대한 설명을 대신 해주는 것처럼 말이죠. 더불어 7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름의 방식대로 잘하고 있는 현재의 제 모습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의 답변을 주고 있기도 하고 말이죠.

어쩌면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몰랐던 그 순간에도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잘하고 있다는 것에 관한 확인을요. 그리고 이 책은 제게 이렇게 말해주네요. “넌 매 순간 틀리지 않았어!”라고. 현재의 자신을 비관하며 실패했다 오해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을 꼭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글: 김인철


<기획회의> 606호(2024년 4월 20일 발행)의 연간 릴레이 연재 코너인 '2024 동네서점대상'에 실린 글입니다.
<기획회의>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발행하는 출판전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