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총서1 _ 대구는 거대한 못이었다
리듬총서
◆ 리듬총서는 사월의눈이 시작하는 첫 총서의 이름이다.
◆ 리듬총서는 세계 혹은 한국에 크거나 작은 단위로 존재하는 지역의 리듬을 포착한다.
◆ 리듬총서는 행정 구역 단위를 너머 지역을 상상하고, 품고, 다시 그리고자 한다.
◆ 리듬총서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에서 영감을 얻어 이름을 갖고왔다.
◆ 리듬총서는 그 어떤 지역도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될 수 없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리듬총서 1: 대구는 거대한 못이었다
리듬총서의 첫 책은 프랑스에 거주 중인 엄도현 사진가의 『대구는 거대한 못이었다』이다. 엄도현 작가가 2021년과 2022년, 두 해에 걸쳐 방문한 대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책 초반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2021년도에 찍은 시리즈로서 대구 관련 주제를 탐색하는 작가의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연작은 이 책의 본문에 해당하며, ‘못’을 소재로 한 작가의 본격적인 대구 관찰기를 담고 있다. 일종의 여행 일기이자 사진에세이이기도 한 이 연작에서 작가는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대구의 못 관련 이야기와 장면들을 담아냈다. 연못과 호수, 저수지와 물 등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 탐색 속에서 대구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도시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동네도, 삼성과 사과의 지역도 아닌, 가상 같기만 한 과거와 현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출렁이는 유동적인 여러 도시 중 하나로 재현될 »”이다.
책 속으로
“이 글과 사진은 내가 대구에서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시도였다. 대구 땅을 걸으며 호수의 흔적을 찾고 호수를 이야기하면서 나 스스로가 호수의 흔적이 되는 경험. 그것은 온전히 내가 느끼고 발견한 대구였다.”
“ … 인터넷 검색창에 ‘대구’를 입력했다. 대구시청 웹사이트 다음으로 ‘대구광역시 나무위키’가 상단에 떴다. 호기심에 나무위키를 클릭하여 정보를 읽어나갔다. 그리고 ‘지리’ 항목에서 대구 기록의 결정적 방향타가 된 문장 하나를 만났다. “대구는 고대에 거대한 연못이었던 곳”.
구전 설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문장이었다. 연못이라 하면 작은 물웅덩이의 수련이나 물가의 작은 정자 등 고즈넉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거대한’이라는 형용사와 ‘연못’이라는 명사의 조합이라니! 이질적인 만큼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장소와도 같았다. ‘거대한 연못’으로 흘러든 강물에 흙이 함께 실려 오면서 오늘의 대구 땅이 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대구 도심에는 못과 호수가 많아졌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은 사라졌고, 호수나 늪이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잊혀졌다. 대구와 호수라는 조합은 흥미로웠다. 썩 어울리지 않은 두 단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설레었다.”
“1899년에 발간된 『대구부읍지』에는 대구에 있던 저수지와 못의 이름, 간략한 위치, 둘레 길이, 깊이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총 94개의 호수와 87개의 못이 소개되어 있다. 모든 못과 호수를 찾아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까지 대구 도심에 존재했던 호수를 중심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성당못과 수성못을 포함해 총 16곳의 호수터에 가보는 것이 목표였다: 효목못(소못), 한골못, 소래못(송라못), 범어못, 배자못, 영선못, 새못, 천왕당못, 날뫼못, 감삼못, 들마못, 윗못, 댕대이못, 범물지. 못과 호수의 이름을 한 글자씩 꼭꼭 눌러썼다. 내일이면 혼자만의 도시 탐사가 시작된다.
호수가 사라진 도시는 무엇을 보여줄까. 호수가 있던 자리는 어떻게 변했을까. 어떤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흥미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긴장감과 기대, 흥분, 비장함이 한데 섞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버스를 타고 수성못으로 향했다. 수성못 오거리에서 내려 호수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식당과 편의시설은 낙후된 편이었다. 어느 골프 연습장 간판에서는 수성못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한때 화려한 색을 뽐냈을 컬러 사진은 수년간의 땡볕에 색이 바래 지금은 희미한 회색 그림자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와 이 사진을 다시 보니 사진 속 호수는 수성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보이는 산자락과 잔잔한 물결만 보고선 당연히 수성못 사진일 거라고 단정했다. 심지어 수성못 가는 길에 있던 사진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보면 볼수록 수성못은 아닌 것 같다. 내 머릿속 수성못의 이미지를 투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지금 대구에서 진행 중인 작업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비록 오래전에 사라진 호수이지만 마치 과거에 만난 것 같은 소못, 한골못,소래못, 범어못, 배자못……. 나의 상상 속 호수의 잔상을 도시가 남긴 흔적 위에 겹쳐 보는 것.”
저자 소개
엄도현
파리세르지 국립고등예술학교와 파리 8대학에서 사진과 현대미술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사진책을 출판하는 한국 · 프랑스 출판사 쎄제디시옹(ces éditions)의 공동 설립자로서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출판 및 전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엄도현 작가가 일상 속에서 수집하는 사진들은 특별한 연출 없이 생활 속에 작은 환기를 불러 일으키는 ‘발견된 장면’들이다.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은 출판 또는 전시의 형태로 소개된다. 작가는 도시를 소재로한 작업 또한 지속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도시에서 잊혀지고 변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2010년부터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
리듬총서1 _ 대구는 거대한 못이었다
리듬총서
◆ 리듬총서는 사월의눈이 시작하는 첫 총서의 이름이다.
◆ 리듬총서는 세계 혹은 한국에 크거나 작은 단위로 존재하는 지역의 리듬을 포착한다.
◆ 리듬총서는 행정 구역 단위를 너머 지역을 상상하고, 품고, 다시 그리고자 한다.
◆ 리듬총서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에서 영감을 얻어 이름을 갖고왔다.
◆ 리듬총서는 그 어떤 지역도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될 수 없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리듬총서 1: 대구는 거대한 못이었다
리듬총서의 첫 책은 프랑스에 거주 중인 엄도현 사진가의 『대구는 거대한 못이었다』이다. 엄도현 작가가 2021년과 2022년, 두 해에 걸쳐 방문한 대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책 초반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2021년도에 찍은 시리즈로서 대구 관련 주제를 탐색하는 작가의 브레인스토밍 과정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연작은 이 책의 본문에 해당하며, ‘못’을 소재로 한 작가의 본격적인 대구 관찰기를 담고 있다. 일종의 여행 일기이자 사진에세이이기도 한 이 연작에서 작가는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대구의 못 관련 이야기와 장면들을 담아냈다. 연못과 호수, 저수지와 물 등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 탐색 속에서 대구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도시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동네도, 삼성과 사과의 지역도 아닌, 가상 같기만 한 과거와 현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출렁이는 유동적인 여러 도시 중 하나로 재현될 »”이다.
책 속으로
“이 글과 사진은 내가 대구에서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시도였다. 대구 땅을 걸으며 호수의 흔적을 찾고 호수를 이야기하면서 나 스스로가 호수의 흔적이 되는 경험. 그것은 온전히 내가 느끼고 발견한 대구였다.”
“ … 인터넷 검색창에 ‘대구’를 입력했다. 대구시청 웹사이트 다음으로 ‘대구광역시 나무위키’가 상단에 떴다. 호기심에 나무위키를 클릭하여 정보를 읽어나갔다. 그리고 ‘지리’ 항목에서 대구 기록의 결정적 방향타가 된 문장 하나를 만났다. “대구는 고대에 거대한 연못이었던 곳”.
구전 설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문장이었다. 연못이라 하면 작은 물웅덩이의 수련이나 물가의 작은 정자 등 고즈넉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거대한’이라는 형용사와 ‘연못’이라는 명사의 조합이라니! 이질적인 만큼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장소와도 같았다. ‘거대한 연못’으로 흘러든 강물에 흙이 함께 실려 오면서 오늘의 대구 땅이 되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대구 도심에는 못과 호수가 많아졌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은 사라졌고, 호수나 늪이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잊혀졌다. 대구와 호수라는 조합은 흥미로웠다. 썩 어울리지 않은 두 단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설레었다.”
“1899년에 발간된 『대구부읍지』에는 대구에 있던 저수지와 못의 이름, 간략한 위치, 둘레 길이, 깊이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총 94개의 호수와 87개의 못이 소개되어 있다. 모든 못과 호수를 찾아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까지 대구 도심에 존재했던 호수를 중심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성당못과 수성못을 포함해 총 16곳의 호수터에 가보는 것이 목표였다: 효목못(소못), 한골못, 소래못(송라못), 범어못, 배자못, 영선못, 새못, 천왕당못, 날뫼못, 감삼못, 들마못, 윗못, 댕대이못, 범물지. 못과 호수의 이름을 한 글자씩 꼭꼭 눌러썼다. 내일이면 혼자만의 도시 탐사가 시작된다.
호수가 사라진 도시는 무엇을 보여줄까. 호수가 있던 자리는 어떻게 변했을까. 어떤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흥미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긴장감과 기대, 흥분, 비장함이 한데 섞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버스를 타고 수성못으로 향했다. 수성못 오거리에서 내려 호수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식당과 편의시설은 낙후된 편이었다. 어느 골프 연습장 간판에서는 수성못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한때 화려한 색을 뽐냈을 컬러 사진은 수년간의 땡볕에 색이 바래 지금은 희미한 회색 그림자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와 이 사진을 다시 보니 사진 속 호수는 수성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로 보이는 산자락과 잔잔한 물결만 보고선 당연히 수성못 사진일 거라고 단정했다. 심지어 수성못 가는 길에 있던 사진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보면 볼수록 수성못은 아닌 것 같다. 내 머릿속 수성못의 이미지를 투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지금 대구에서 진행 중인 작업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비록 오래전에 사라진 호수이지만 마치 과거에 만난 것 같은 소못, 한골못,소래못, 범어못, 배자못……. 나의 상상 속 호수의 잔상을 도시가 남긴 흔적 위에 겹쳐 보는 것.”
저자 소개
엄도현
파리세르지 국립고등예술학교와 파리 8대학에서 사진과 현대미술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사진책을 출판하는 한국 · 프랑스 출판사 쎄제디시옹(ces éditions)의 공동 설립자로서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출판 및 전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엄도현 작가가 일상 속에서 수집하는 사진들은 특별한 연출 없이 생활 속에 작은 환기를 불러 일으키는 ‘발견된 장면’들이다.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은 출판 또는 전시의 형태로 소개된다. 작가는 도시를 소재로한 작업 또한 지속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도시에서 잊혀지고 변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2010년부터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