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북노마드 일본단편선 여섯 번째 주인공은 호리 다쓰오의 『늦여름』이다. 호리 다쓰오의 문학은 ‘삶과 죽음과 사랑의 문학’으로 정의된다. 그만큼 이 주제를 고민하고 소설에 포개었다.
호리는 일본 근대소설을 지배했던 ‘사소설’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말 그대로 ‘이야기’를 짓는 ‘소설’의 영역에 들어섰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소설을 쓰는 주체가 사람인 만큼 오로지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짓기란 어려운 일이다. 호리 역시 ‘삶과 죽음과 사랑’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문학에 투영했다.
1904년, 호리는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호리는 적자로 인정받았지만, 첫 번째 부인이 있는 상황에서 아들과 떨어질 수 없었던 어머니는 1906년 호리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2년 후 재혼했으나, 1910년 호리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받게 된 연금을 아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했다.
호리가 고등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해인 1923년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였다. 이 해에 호리는 소설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일본의 소도시 ‘가루이자와’를 알았고, 문학의 동반자이자 스승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만났다. 같은 해 9월 1일에는 간토 대지진이 발생했다. 호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어머니는 강물에 빠져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호리가 겪은 첫 죽음이었다.
이러한 사건은 호리 문학의 바탕으로 자리 잡았다. 「얼굴」에서 루이가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장면은 호리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며칠간 강물을 헤맨 일을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수색의 피로로 호리는 늑막염에 걸렸고, 이후 흉부 질환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삶, 죽음, 사랑, 그리고 여행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심신의 허약을 호리는 독서, 글쓰기, 문인과의 교류, 가루이자와 여행으로 이겨냈다. 교내 잡지에 투고한 산문 「쾌적주의(快適主義)」에서 그는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을 쾌적하게 보내는 법’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이렇게 해답을 제시한다. 빨간색은 고통, 흰색은 쾌적함이라고 가정한 그는 “우선 빨간색 부분은 명확하게 빨간색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흰색 물감을 가지고 그 빨간색 부분을 하얗게 칠한다”라고 적은 그에게서 고통을 피하지 않고 즐기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1924년과 1925년, 호리는 두 번에 걸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가루이자와 여행을 떠났다. 1925년에는 대학에 진학해 나카노 시게하루(소설가, 시인), 고바야시 히데오(문예평론가) 등과 교류를 이어갔다. 그리고 소설을 썼다.
1927년 7월의 어느 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자살한다. 그를 스승처럼 따랐던 호리가 받았을 충격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29년, 호리는 졸업 논문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론(1929)」을 제출한다. “저에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논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제 안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라는 서문에서 그가 겪었던 고통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뿌리가 잘린 듯한 고통 속에서 호리는 다음과 같이 답을 내렸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제 눈을
‘죽은 자의 눈을 감겨주듯이’
조용히 뜨게 해주었습니다.”
호리가 평생에 걸쳐 여닫은 ‘삶과 죽음’이라는 관문에 당도한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이겨내려고 노력했던 호리는 아쿠타가와의 죽음 앞에서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삶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기, 그 과정은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결국 ‘살아 있다’는 증명이었다.
아쿠타가와를 논하며 자신을 냉정하게 되돌아본 호리는 아쿠타가와의 죽음을 모티프 삼은 소설 『성가족(聖家族)』(1930)을 발표했다. 소설은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호리는 탈고 이후 각혈을 일으켜 요양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유약했던 호리에게 가루이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시절에도 이미 유명한 휴양지였던 가루이자와로 호리는 요양을 떠난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그곳에서 호리는 야노 아야코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가루이자와에 있다는 사실은 그녀 역시 요양을 왔음을 의미할 터. 두 사람은 함께 병원에 입원하고, 아야코는 호리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와 스승은 갑작스럽게 떠났지만,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 아야코와의 이별은 분명 달랐다. 호리는 소중한 하루하루를 함께하며 죽음 너머의 삶, 운명 바깥의 삶을 확신하게 해주는 ‘사랑’의 위대함을 대표작 『바람이 분다』(1937년)에 그려냈다.
어머니, 스승, 연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계속해서 지켜본 호리에게 죽음은 늘 곁에 둬야 하는 존재였다. 역설적으로 호리는 죽음에서 강렬한 생명을 느꼈다. 호리가 시대의 유행이나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문학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죽음을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운명 덕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죽음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호리 다쓰오의 작품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명백히 다를 것이다. 두렵고 피해야 하는 개념이 아닌,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어둠을 정면에서 바라보고(「잠든 사람」), 나이 듦(죽음)과 젊음(삶)은 공존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우치기(「늦여름」). 호리 다쓰오의 문장이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목차
늦여름 1940 6
X 씨의 수첩 1929 40
잠든 사람 1929 48
얼굴 1933 68
옮긴이의 말 99
작가 연보 108
책 속으로
오늘 아침 갑자기 마음이 움직여서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지내는 산속 집을 잠시 떠나 노지리(野尻)호수에 왔다. 실은 어제 오랜만에 마을에 내려간 김에 과자라도 사서 돌아갈까 싶었는데 가게들이 대부분 장사를 마친 상황이었다. 마을 외곽까지 가서야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아메리칸 베이커리를 발견하고 뛰어 들어갔지만 사고 싶은 것이 거의 없었다. 바움쿠헨 밑동 부분이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절반밖에 없어서 좋아하는 빵이지만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다.
- 「늦여름」 중에서
처음에는 가루이자와도 조금 물리기 시작했으니 시가(志賀)고원, 도가쿠시(戸隠)산, 노지리호수 등을 돌 수 있는 만큼 돌아보고 내년 여름을 보낼 곳을 지금부터 물색하려고 했다. 하지만 쉽게 지치는 내 체력을 고려해 일단은 가장 편한 코스인 노지리호수로 왔다. 어쩐지 외국인들이 가는 곳만 쫓아다니는 것 같아 석연치 않은 마음도 들지만, 그들이 찾아내는 곳에는 놓치기 아까운 재미가 있었다. 사람들이 잘 모를 법한 산속에서 신기하게도 이국적인 풍경을 찾아내는데, 고국을 떠난 이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향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산속에서 여름을 보내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겠지만, 불편을 참고 그들의 방식으로 길들인 것이다. 그런 곳이 내 마음을 끄는 것 같다.
- 「늦여름」 중에서
어쩐지 오늘은 굉장히 좋은 날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아래층에서 세수하고 올라와서 어제 보던 작은 책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하지만 막상 좋은 날을 대놓고 기다린다는 기분이 들자, 딱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우선 오늘 아침은 안개가 짙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날이 흐려서 하늘도 호수도 온통 옅은 먹색이었다. 묘코산도 구로히메산도 구름 없이 윤곽만 뿌옇고 희미하게 보였다. 이대로 온종일 흐릴 것 같은 불안한 흐린 날씨였다. 날이 흐리면 어딜 나가도 소용이 없을 테니 날이 갤 때까지 조용히 책이나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게 가장 나다운 방법이다. 이 책을 읽으러 일부러 이 호수에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 「늦여름」 중에서
나로 말하자면, 이제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등을 밀어주던 공기의 흐름도 멈춰버렸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피로감을 느꼈다. 너무나도 졸렸다. 난 그 자리에 서서 잠깐씩 잠들었다. 꿈을 꿨다. 꿈이 내 짤막한 잠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이 현실과 부딪친다. 그것이 얼마나 짧은 꿈이든 나에게는 길게만 느껴진다. 나는 하루의 모든 시간에 꿈을 꾼다.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 그러다가 꿈과 현실이 중첩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다. 가끔 어디선가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그리고 내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듣는다.
- 「잠든 사람」 중에서
어느새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전보다 조금 더 세게. 바람은 마치 연기처럼 나뭇가지에 걸리고 어디선가 종잇조각을 날라 왔다. 음울한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나의 슬픔이 만족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죽은 친구를 위해 이렇게 하룻밤을 지새운 것일까? 피로와 졸음이 밀려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골목 너머의 불길한 암흑 속을 응시했다. 마치 처음으로 밤이라는 것을 목도한 사람처럼.
- 「잠든 사람」 중에서
어느 밤, 루이는 그 창백하고 마른 소년과 함께 아무도 없는 운동장으로 도망쳤다. 두 사람 모두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 소년은 언제부터인지 루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소년은 가냘프게 계속 기침했다. 루이는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친구의 뺨이 그때만큼은 살짝 달아오르는 것을 어둠 속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루이는 소년의 새하얀 얼굴이 부러웠다. 루이는 그 친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루이는 그저 그 소년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교실에서 친구의 가느다란 목과 부드러운 머리카락 주변에 자신의 꿈을 엮었다.
- 「얼굴」 중에서
작가 소개
호리 다쓰오 堀辰雄
190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3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만나 192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사사받았다. 1929년 도쿄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예술파 문학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불안정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신선한 심리주의적 묘사라는 문학 세계를 꿋꿋이 고수했으며, 사랑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곳에서 진정한 생을 발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통해 사소설(私小說) 중심이었던 당시 일본 소설의 흐름에서 ‘지어낸 이야기(픽션)’로 낭만파 문학 형식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쟁 말기부터 결핵 증상이 악화되어 전후에는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로 요양하다 1953년 사망했다. 시의 감수성을 지닌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성가족(聖家族)』 『아름다운 마을(美しい村)』 『바람이 분다(風立ちぬ)』 등이 있다.
늦여름
북노마드 일본단편선 여섯 번째 주인공은 호리 다쓰오의 『늦여름』이다. 호리 다쓰오의 문학은 ‘삶과 죽음과 사랑의 문학’으로 정의된다. 그만큼 이 주제를 고민하고 소설에 포개었다.
호리는 일본 근대소설을 지배했던 ‘사소설’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말 그대로 ‘이야기’를 짓는 ‘소설’의 영역에 들어섰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소설을 쓰는 주체가 사람인 만큼 오로지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짓기란 어려운 일이다. 호리 역시 ‘삶과 죽음과 사랑’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문학에 투영했다.
1904년, 호리는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호리는 적자로 인정받았지만, 첫 번째 부인이 있는 상황에서 아들과 떨어질 수 없었던 어머니는 1906년 호리를 데리고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2년 후 재혼했으나, 1910년 호리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받게 된 연금을 아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했다.
호리가 고등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해인 1923년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해였다. 이 해에 호리는 소설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일본의 소도시 ‘가루이자와’를 알았고, 문학의 동반자이자 스승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만났다. 같은 해 9월 1일에는 간토 대지진이 발생했다. 호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어머니는 강물에 빠져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호리가 겪은 첫 죽음이었다.
이러한 사건은 호리 문학의 바탕으로 자리 잡았다. 「얼굴」에서 루이가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장면은 호리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며칠간 강물을 헤맨 일을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수색의 피로로 호리는 늑막염에 걸렸고, 이후 흉부 질환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삶, 죽음, 사랑, 그리고 여행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심신의 허약을 호리는 독서, 글쓰기, 문인과의 교류, 가루이자와 여행으로 이겨냈다. 교내 잡지에 투고한 산문 「쾌적주의(快適主義)」에서 그는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을 쾌적하게 보내는 법’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이렇게 해답을 제시한다. 빨간색은 고통, 흰색은 쾌적함이라고 가정한 그는 “우선 빨간색 부분은 명확하게 빨간색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흰색 물감을 가지고 그 빨간색 부분을 하얗게 칠한다”라고 적은 그에게서 고통을 피하지 않고 즐기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1924년과 1925년, 호리는 두 번에 걸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가루이자와 여행을 떠났다. 1925년에는 대학에 진학해 나카노 시게하루(소설가, 시인), 고바야시 히데오(문예평론가) 등과 교류를 이어갔다. 그리고 소설을 썼다.
1927년 7월의 어느 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자살한다. 그를 스승처럼 따랐던 호리가 받았을 충격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29년, 호리는 졸업 논문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론(1929)」을 제출한다. “저에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논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가 제 안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라는 서문에서 그가 겪었던 고통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뿌리가 잘린 듯한 고통 속에서 호리는 다음과 같이 답을 내렸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제 눈을
‘죽은 자의 눈을 감겨주듯이’
조용히 뜨게 해주었습니다.”
호리가 평생에 걸쳐 여닫은 ‘삶과 죽음’이라는 관문에 당도한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이겨내려고 노력했던 호리는 아쿠타가와의 죽음 앞에서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삶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기, 그 과정은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결국 ‘살아 있다’는 증명이었다.
아쿠타가와를 논하며 자신을 냉정하게 되돌아본 호리는 아쿠타가와의 죽음을 모티프 삼은 소설 『성가족(聖家族)』(1930)을 발표했다. 소설은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호리는 탈고 이후 각혈을 일으켜 요양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유약했던 호리에게 가루이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시절에도 이미 유명한 휴양지였던 가루이자와로 호리는 요양을 떠난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그곳에서 호리는 야노 아야코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가루이자와에 있다는 사실은 그녀 역시 요양을 왔음을 의미할 터. 두 사람은 함께 병원에 입원하고, 아야코는 호리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와 스승은 갑작스럽게 떠났지만,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 아야코와의 이별은 분명 달랐다. 호리는 소중한 하루하루를 함께하며 죽음 너머의 삶, 운명 바깥의 삶을 확신하게 해주는 ‘사랑’의 위대함을 대표작 『바람이 분다』(1937년)에 그려냈다.
어머니, 스승, 연인……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계속해서 지켜본 호리에게 죽음은 늘 곁에 둬야 하는 존재였다. 역설적으로 호리는 죽음에서 강렬한 생명을 느꼈다. 호리가 시대의 유행이나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문학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데에는 죽음을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운명 덕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죽음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호리 다쓰오의 작품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명백히 다를 것이다. 두렵고 피해야 하는 개념이 아닌,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어둠을 정면에서 바라보고(「잠든 사람」), 나이 듦(죽음)과 젊음(삶)은 공존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우치기(「늦여름」). 호리 다쓰오의 문장이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목차
늦여름 1940 6
X 씨의 수첩 1929 40
잠든 사람 1929 48
얼굴 1933 68
옮긴이의 말 99
작가 연보 108
책 속으로
오늘 아침 갑자기 마음이 움직여서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지내는 산속 집을 잠시 떠나 노지리(野尻)호수에 왔다. 실은 어제 오랜만에 마을에 내려간 김에 과자라도 사서 돌아갈까 싶었는데 가게들이 대부분 장사를 마친 상황이었다. 마을 외곽까지 가서야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아메리칸 베이커리를 발견하고 뛰어 들어갔지만 사고 싶은 것이 거의 없었다. 바움쿠헨 밑동 부분이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절반밖에 없어서 좋아하는 빵이지만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다.
- 「늦여름」 중에서
처음에는 가루이자와도 조금 물리기 시작했으니 시가(志賀)고원, 도가쿠시(戸隠)산, 노지리호수 등을 돌 수 있는 만큼 돌아보고 내년 여름을 보낼 곳을 지금부터 물색하려고 했다. 하지만 쉽게 지치는 내 체력을 고려해 일단은 가장 편한 코스인 노지리호수로 왔다. 어쩐지 외국인들이 가는 곳만 쫓아다니는 것 같아 석연치 않은 마음도 들지만, 그들이 찾아내는 곳에는 놓치기 아까운 재미가 있었다. 사람들이 잘 모를 법한 산속에서 신기하게도 이국적인 풍경을 찾아내는데, 고국을 떠난 이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향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산속에서 여름을 보내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겠지만, 불편을 참고 그들의 방식으로 길들인 것이다. 그런 곳이 내 마음을 끄는 것 같다.
- 「늦여름」 중에서
어쩐지 오늘은 굉장히 좋은 날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아래층에서 세수하고 올라와서 어제 보던 작은 책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하지만 막상 좋은 날을 대놓고 기다린다는 기분이 들자, 딱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우선 오늘 아침은 안개가 짙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날이 흐려서 하늘도 호수도 온통 옅은 먹색이었다. 묘코산도 구로히메산도 구름 없이 윤곽만 뿌옇고 희미하게 보였다. 이대로 온종일 흐릴 것 같은 불안한 흐린 날씨였다. 날이 흐리면 어딜 나가도 소용이 없을 테니 날이 갤 때까지 조용히 책이나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게 가장 나다운 방법이다. 이 책을 읽으러 일부러 이 호수에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 「늦여름」 중에서
나로 말하자면, 이제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등을 밀어주던 공기의 흐름도 멈춰버렸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피로감을 느꼈다. 너무나도 졸렸다. 난 그 자리에 서서 잠깐씩 잠들었다. 꿈을 꿨다. 꿈이 내 짤막한 잠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이 현실과 부딪친다. 그것이 얼마나 짧은 꿈이든 나에게는 길게만 느껴진다. 나는 하루의 모든 시간에 꿈을 꾼다.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 그러다가 꿈과 현실이 중첩된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다. 가끔 어디선가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그리고 내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듣는다.
- 「잠든 사람」 중에서
어느새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전보다 조금 더 세게. 바람은 마치 연기처럼 나뭇가지에 걸리고 어디선가 종잇조각을 날라 왔다. 음울한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나의 슬픔이 만족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죽은 친구를 위해 이렇게 하룻밤을 지새운 것일까? 피로와 졸음이 밀려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골목 너머의 불길한 암흑 속을 응시했다. 마치 처음으로 밤이라는 것을 목도한 사람처럼.
- 「잠든 사람」 중에서
어느 밤, 루이는 그 창백하고 마른 소년과 함께 아무도 없는 운동장으로 도망쳤다. 두 사람 모두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 소년은 언제부터인지 루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소년은 가냘프게 계속 기침했다. 루이는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친구의 뺨이 그때만큼은 살짝 달아오르는 것을 어둠 속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루이는 소년의 새하얀 얼굴이 부러웠다. 루이는 그 친구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루이는 그저 그 소년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교실에서 친구의 가느다란 목과 부드러운 머리카락 주변에 자신의 꿈을 엮었다.
- 「얼굴」 중에서
작가 소개
호리 다쓰오 堀辰雄
190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3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만나 192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사사받았다. 1929년 도쿄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예술파 문학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불안정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신선한 심리주의적 묘사라는 문학 세계를 꿋꿋이 고수했으며, 사랑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곳에서 진정한 생을 발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통해 사소설(私小說) 중심이었던 당시 일본 소설의 흐름에서 ‘지어낸 이야기(픽션)’로 낭만파 문학 형식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쟁 말기부터 결핵 증상이 악화되어 전후에는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로 요양하다 1953년 사망했다. 시의 감수성을 지닌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성가족(聖家族)』 『아름다운 마을(美しい村)』 『바람이 분다(風立ちぬ)』 등이 있다.